[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34> 4·3 폄훼에 대한 대응②

2000년 11월24일 제주경찰청 코앞에서 벌어진 '제주경찰사 왜곡 규탄 도민대회'에서 행불유족회 이중흥 공동대표가 선봉에 서서 50여년의 한을 토해내듯 통렬히 구호를 외치고 있다.

 10년 전 내용 그대로 수록…4·3진영 총궐기
"진상조사후 수정" 버티다 중앙 지시로 선회

4·3 폄훼에 대한 대응 ②
2000년 11월24일 제주경찰청 앞에서 4·3유족들과 4·3관련단체 관계자 등 300여명이 모여 경찰을 규탄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제주경찰사 4·3역사 왜곡 규탄 도민대회'란 긴 이름이 붙은 항의 집회였다.

그날 찍힌 한장의 사진은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경찰을 규탄하는 인파와 플래카드 맨 앞에 선 사람이 오른손을 번쩍 들고 소리 높여 구호를 외치는 모습이다. 그는 바로 4·3행불유족회 이중흥 공동대표였다.

이 대표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어떻게 피해를 입었는지 모르고 살았다. 그는 4·3 당시 제주읍 연동에서 농사를 짓던 아버지가 갑자기 주정공장으로 끌려간 후 소식이 끊겼다는 막연한 이야기만 있을 뿐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 모른 채 50여년의 세월동안 가슴앓이 해왔다. 그런데 1999년 발굴된 수형인 명부를 통해 부친이 불법적인 군법회의에 의해 무기형을 언도받고 마포형무소에 복역했던 사실을 알게 됐다. 그후 행불유족회 결성에 앞장섰던 그는 경찰의 역사 왜곡에 분노를 느끼고 50여년의 한을 토해내듯 이날 선봉에 나선 것이다.

이 연재의 36회(2011년 5월13일자)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제주경찰사 파문'은 2000년 10월 제주경찰청이 「제주경찰사」 개정판을 내면서 10년전에 문제가 됐던 4·3관련 왜곡 내용을 전혀 수정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발행하면서 야기됐다. 즉, 4·3사건의 성격을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좌익분자의 만행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하는가하면 400명 가까운 한 마을 주민이 군인에 의해 집단 학살된 '북촌사건'을 공비들의 소행으로 둔갑시켰다. 또한 공비의 숫자는 '1만6960명'에 이르고, 4·3 사망자 숫자는 '9345명'에 불과하다고 표기하는 등 왜곡 사례가 수두룩했다.

필자는 「제주경찰사」가 처음 발행된 1991년 1월에 「제민일보」 톱기사로 4·3 왜곡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그때는 거들어주는 세력이 누구 하나 없었다. 10년만에 똑같은 일이 반복되자 이번에는 4·3진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경찰은 그 10년 사이의 변화를 간과했던 것이다.

4·3 민간인유족회, 행불유족회, 4·3도민연대, 4·3연구소, 민예총 제주도지회 등 5개 단체가 모여 '4·3역사 왜곡 제주경찰사 발간에 따른 도민 대책위원회'(공동대표 김상철·김창후·문창우·박창욱·이중흥)를 구성했다. 이 연합단체가 중심이 되어 제주경찰청 코앞에서 제주청장의 사퇴와 「제주경찰사」의 전량 폐기를 요구하며 도민규탄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이어 11월30일 제주경찰청 회의실에서 경찰 간부와 도민대책위원회 관계자들 사이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간담회가 열렸다. 이날 회동은 3시간 이상 진행됐으나 결말을 내지 못했다. 대책위 측은 제주경찰사의 전량 폐기, 관계자 문책, 청장의 공개사과 등을 요구했다. 이에 경찰 측은 "과거 선배가 한 일을 객관적인 자료도 없이 어떻게 수정하느냐"면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 결과가 나오면 수정할 용의가 있다고 버텼다.

이날 회합이 성과없이 끝나자 대책위 측은 그 수위를 높여 12월9일 2차 도민규탄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상경 투쟁을 벌이기로 했다. 또한 4·3 중앙위원인 김정기 서원대 총장이 12월1일자 「한겨레신문」에 '제주경찰의 4·3왜곡'이란 제하의 논단을 발표하면서 전국적 이슈로 부각됐다.

그런데 간담회 하루 만에 제주경찰이 돌연 자세를 바꿨다. 12월1일 경찰 측은 대책위에 「제주경찰사」를 전량 회수하여 70여 쪽에 이르는 4·3 관련 부분을 삭제하여 재발간할 용의가 있다고 제시해왔다. 또한 경찰사 발간 관계자들을 주의조치 등으로 문책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대책위는 이런 경찰 측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12월2일 양측은 다시 회동했다. 이 자리에서 「제주경찰사」의 4·3 관련 부분을 삭제하기로 결정했다. 남국현 지방청장은 마음에 상처를 입은 4·3 유족들에게 죄송하다는 사과의 뜻도 밝혔다. 이렇게 해서 지역언론에 의해 그해 '제주도 10대 뉴스'로 선정되기도 했던 경찰사 파문은 일단락됐다.

그런데 경찰이 이렇게 태도를 바꾼 배후에는 추미애 의원이 있었다. 추 의원은 제주도에서 4·3진영이 치열한 항의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서울 소재 경찰청 간부들을 국회로 불러들였다. 당시는 DJ정권 시절이고, 추 의원은 잘 나가던 여당의 '실세' 국회의원이었다.

추 의원 쪽에서는 4·3특별법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과거사 해결에 임하는 대통령의 뜻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등을 따진 것이다. 결국 「제주경찰사」 파문은 제주경찰이 스스로 풀지 못했던 문제를 추 의원의 영향력에 의해 중앙 경찰이 개입해 해결 방안을 제시함으로써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다음회는 '4·3유족회의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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