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35> 4·3유족회의 통합


민간인·행불유족회 통합 거대조직 변신
월간조선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 등 강공

4·3유족회의 통합
2000년 8월13일 4·3 행방불명인 유족 300여명이 구좌읍 비자림에 모여 단합 겸 결의대회를 가졌다. 한 맺힌 세월을 보내온 행불 유족들에게는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마음의 고통을 서로 나누는 뜻깊은 행사였다.

필자는 이날 '제주4·3 양민학살사건의 진상'이란 주제의 특강을 했다. 쟁점이 되고 있는 4·3 발발의 원인과 불법 학살극의 실상, 그리고 공산폭동론의 허구성에 대해 설명했다. 필자는 이어 당면 과제로 4·3문제를 풀기 위한 제주도민, 특히 유족들의 단합과 정부의 노력, 미국의 비밀문서 공개 등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날 행사에서 크게 세가지의 결의가 있었다. 첫째는 보수진영의 4·3 폄훼에 강력 대응한다는 것, 둘째는 내부 조직을 강화한다는 것, 셋째는 기존의 민간인유족회와 통합을 모색하자는 것 등이었다.

행불유족들은 보수진영에서 4·3특별법이 위헌이라며 헌법 소원을 제기한 일에도 공분을 느꼈지만, 특히 제주도내 보수단체에서 수형인들을 위령대상에서 제외하라는 내용의 성명을 밝힌 것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이에 앞서 대한민국건국회 제주도지부 등 18개 보수단체에서 4·3사건 당시 수형인명부에 게재된 자는 4·3위령제 때 위패를 올려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자신의 가족을 겨냥한 것이나 다름없는 이런 망언에 격분한 행불유족들은 보수진영의 4·3 폄훼 기도에 적극 대응하기로 다짐을 한 것이다.

행불유족회 조직 강화는 특별위원회 구성으로 가시화됐다. 즉 희생자들이 복역하다가 행방불명된 육지 형무소 별로 경인·대전·영남·호남위원회와 제주도내에서 행불된 희생자 유족을 중심으로 제주특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한 것이다. 이런 특별위원회 구성은 유족들 간의 결속을 더욱 다지는 계기가 됐다.

유족회 통합 논의는 2001년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다뤄졌다. 민간인유족회나 행불유족회 모두 4·3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해서는 유족회가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했다. 특히 4·3문제 해결을 위한 도민 화합을 끌어내고 유족회의 활성화를 위해서도 그 필요성에 공감했다.

두 유족회는 '제주도4·3사건희생자유족회 창립위원회'(위원장 박창욱)를 구성하는데 합의했다. 이 창립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논의를 거듭한 끝에 2001년 2월28일 유족회 통합을 공식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제주도내에서 가장 강력한 단체의 탄생을 예고한 것이다.

통합 유족회인 제주도4·3사건희생자유족회 창립대회는 3월3일 제주도체육회관 강당에서 열렸다. 통합 유족회 초대 회장에는 이성찬, 상임부회장 김두연, 부회장 양영호·이상하·이중흥·정문현, 감사 고윤권·한대범, 사무국장 박영수 등이 임원으로 선출됐다.

민간인유족회에 비해 연륜이나 회원 수 등에서 훨씬 열세였던 행불유족회 출신들이 오히려 회장과 사무국장 등 요직을 차지했다. 행불유족회가 출범 1년밖에 안됐지만 그만큼 결속력과 추진력을 보여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통합 유족회는 4·3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진상규명에 우선 방점을 찍었다. 그리고 4·3 자료 발굴, 희생자 추모 및 유족 확인, 행방불명된 희생자 행방 찾기운동 등을 전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뒤의 활동을 보면, 주정공장 옛터에서의 행불 희생자 진혼제, 전국형무소 옛터와 학살터 순례, 혼백 모셔오는 행사, 해원방사탑 건립사업 등을 추진했다. 또한 보수진영의 4·3 폄훼 시도가 있을 때에는 4·3 관련단체와 연대하거나 독자적으로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그 중의 하나가 「월간조선」을 상대로 한 명예훼손 소송이다. 「월간조선」 2001년 10월호에 '국군지휘부의 자해행위'란 제목아래 국방부가 여순사건을 미화한 영화 <애기섬> 제작에 군 장비를 지원했다는 기사가 떴다. 그런데 이 기사 속에 여순사건을 주로 다루면서 제주4·3을 살짝 언급했는데, 그것은 1980년대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나왔던 "북한의 지령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무장폭동"이란 표현이었다.

「월간조선」이 계속 4·3에 대한 이념 공세를 해왔기 때문에 쐐기를 박기 위해 2002년 이성찬 유족회장 등 유족 435명의 이름으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2008년에 와서 원고 패소 판결이 나왔는데, 재판부는 희생자 개개인을 적시한 구체적 기사가 아닌 점,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보고서 발행 이전에 기사화된 점 등을 들었다.

그럼에도 이 소송이 한때 정치 이데올로기적으로만 4·3문제를 다뤄오던 「월간조선」을 견제하는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그 후의  「월간조선」 보도태도를 보면 그렇다. 「월간조선」 측도 피해 당사자인 유족들이 직접 나서는 바람에 당혹스럽게 여겼던 것 같다.  

☞다음회는 '뉴욕타임스 4·3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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