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앤팡> 미술과 문화
[김유정의 미술로 보는 세상] 삼다 아닌 오다

역사적으로 숱한 가뭄에 시달리다 보니 허벅이 탄생돼 
말(馬)이 많아 돌 문화에도 영향 오늘의 돌담을 이루어

흔히 제주를 일러 돌, 바람, 여자 삼다도(三多島)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삼다(三多)만으로 제주의 풍토를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주를 그나마 바로 이해하려면 삼다에 꼭 덧붙여야 할 것이 가뭄(旱)과 말(馬)이다. 제주는 다른 지역에 비해 강수량이 많지만, 화산섬이라는 현무암 지대는 많은 강수량에도 불구하고 투수율이 높아 건천(乾川)을 이룸으로써 역사적으로 숱한 가뭄에 시달렸다. 또 말(馬)이 많다 보니 잣담, 밭담, 산담 등 돌 문화에도 영향을 미쳐 오늘의 돌담을 이루었다. 따라서 제주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돌(石多), 바람(風多), 여자(女多), 가뭄(旱多), 말(馬多) 등 오다(五多)를 인식해야 한다. 그럴 때 삼다에서 보이지 않았던 제주 문화의 지평은 확장된다.

▲ 작지왓의 지름작지
석다(石多)의 풍토

제주는 화산섬으로 구멍이 많은 검은 돌(石多)로 이루어졌다. 제주돌은 창해(蒼海) 한가운데에서 나온 불의 돌이다. 모두가 화산암이라는 특성상 석질은 다양하지 않은 편이다. 제주돌은 구멍이 많고 주로 검은 색으로서 비현정질(非顯晶質) 현무암이 많다. 혹은 회색의 조면암이 있으나 돌이 물러 풍화에는 약하다. 제주돌은 기포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화산암은 화산 폭발시 공기 중에 노출되어 굳어지면서 산소를 함유하고 있어 기공(氣孔)이 생긴 때문에 석상을 만들면 작은 선이나 형태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선이 굵고 바르지 않아 가까이에서 보면 어떤 형상인지 알아볼 수 없다. 실제로 제주돌의 모습은 투박함 그 자체다. 그래서 세련된 촉감보다는 질박한 느낌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제주 돌로 만든 석상의 느낌이 강한 인상으로 남는 것도 굵은 선으로 표현된 단순성과 투박함 때문이다. 미세한 기교를 부릴 수 없는 특징이 이미 재료에 노출되었다고나 할까. 현무암은제주의 대표적인 토산재로서 건축, 생활용구, 석상, 석축에 고루 이용돼 제주의 독특한 돌 문화를 이끌어내었다. 제주에 돌담이 많은 이유는, 거의 모든 장소에서 산출되는 많은 돌의 처치, 밭이나 집, 길 등 경계선 구획, 마소의 도망 방지, 방풍효과 등이며 대개의 제주 남자들은 담장을 쌓을 줄 알며 돌담을 쌓는 기술이 발달돼 있다. 돌담을 쌓다가 그래도 남으면 밭 곳곳에 돌을 모아 일종의 석퇴(石堆)인 '머돌'을 만들며, 밭 구석 돌담을 끼고 '잣벡'이라는 돌벽(石築)을 만들어 두었다가 친인척의 장례 시 산담을 만들 때 재사용한다.

풍다(風多)의 풍토

제주는 남태평양에서 불어오는 계절풍의 길목이라 온갖 바람(風多)이 잘 타는 곳이다. 바람은 초가의 모양과 구조, 풍향수, 돌담의 경관을 만들어 내었다. 바람은 바다의 생산력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잠녀들의 영등신 신앙과 요왕(용왕)신화를 탄생시켰다. 바람은 외방(外方) 문화를 데려왔으며, 표류와 표착의 한 많은 사연을 여러 가지 전설로 만들어내었다. 바람의 문화는 곧바로 삶의 문화가 되었다. 제주 사람들은 바람에 대해 매우 민감하여 그 이름도 무척 다양하고 바람의 성격도 각각 다르게 인식한다.

바람(wind, 風)은 제주어로는 '',혹은 '름'이라고 한다. 15세기 표기로는 ''이니, 제주사람들은 현재까지 15세기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바람을 성격에 따라 구분하면, 갑작스럽게 부는 바람을 '?름 주제'라고 한다. 전혀 예상치도 못하게 부는 바람을 말하는 것이다. 회오리 바람을 '도껭이' 혹은 '뫼오리'라고 하며, 갑작스럽게 부는 회오리바람을 '도껭이 주제'라고 한다. 바람 방향이 바뀔 즈음 서로 엇갈려서 양쪽에서 오는 바람을 '양도새'라고 하고, 초겨울 산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도지'라고 하며, 갑자기 부는 초겨울 산바람을 '도지 주제'라고 한다.

제주의 특이한 풍경 중 까마귀들이 하늘을 선회하며 장관을 연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제주의 들녘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까마귀들의 빠른 원무(圓舞)는 기이할 정도로 장관이다. 날씨가 나빠지려고 하면 수 십 마리에서 수 백 마리가 하늘 한가운데를 빙빙 돌며 빠르게 하강했다가 다시 솟구치기를 반복하는 까마귀들의 모습을 '풍조(風鳥)'라고 한다. 이풍조를 제주에서는 '??까마귀'라고 한다. 날씨가 을씨년스러워 싫은 바람이 불 때 하는 말로, '그년의 ?름'이라고 한다. 은연중에 기가 세고 모진 제주 여성을 빗댄 말이다. 

여다(女多)의 풍토

제주에 '여자가 많다(女多)'는 것은 한 많은 제주의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다. 섬의 환경이 열악하다보니 여성의 일과 남성의 일도 확연히 구분된다. 남성들은 집을 짓거나 고치는 일, 돌담 쌓기, 마소 관리, 밭 갈기, 고기잡이, 부역(賦役), 사냥, 등을 하며, 여성들은 가사, 육아, 의복 만들기 외에도 농사, 물질, 물 긷기 등 힘에 부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면 가리지 않았다. 여성이 생산 활동이 많다보니 경제적인 자립도가 높은 편이어서 경제권이 남성과 동등하다. 여성이 경제적인 독립성이 높다보니 다른 지역보다 이혼과 재혼을 많이 하지만 이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사실 여다는 남자들이 바다를 건너온 외세의 침략에 맞서다 죽거나 진상선(進上船)의 사공·격군으로 동원되었다가 해난 사고를 당해 남자가 많이 부족한 때문이었다. 남자가 부족(女多)하자 조선의 지배계급은 변방의 국경을 불안해했고, 그들은 변란에 대비해 삼읍에서 힘이 센 여자들을 뽑아다 남정들의 빈자리를 채웠다. 부족한 남자의 신역(身役)을 강제로 떠맡기는 바람에 '여정(女丁)'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이 여정(女丁)이라 불리는 예비군 제도는 지배체제의 폭력에 다름 아니었다. 양반자제들과 유생들이 병역을 면제 받고 글공부하는 사이에 여성들은 군인으로 변신해 살받이터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世不同席)'을 주장했던 유교의 강상윤리(綱常倫理)에도 위배되고, 남자가 모자라면 육지에서 원병이 와 지켜야 할 군역임에도 그것을 묵인한 것이다.

여정(女丁)은 사노비에서 유래한다. 인조 3년(1625) 7월 3일, 비변사에서 북도(함경도 함흥지역)의 사노비들 중 건강한 남정은 군역을 지고, 노약자와 여정(女丁)은 군역 대신 군량을 약간 바치라는 계가 있었으나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가, 4일 지난 7월 7일에 비국(備局)이 다시 아뢰자 '노약자와 여정(女丁)은 쌀을 내어 군량을 보조하라'고 번복했다. 일찍이 1609년(광해1) 오윤겸이 어사가 되어 함흥(咸興) 이북의 사노비(私賤)들을 모두 추려내어 군역(軍役)에 충당했는데, 그 수가 4천여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이미 십 수 년이 지나자 사노비들이 남아 있는지, 죽었는지, 아니면 다른 데로 옮겨 갔는지, 군적(軍籍)에 모두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없어서 군적을 다시 작성하면서 나온 것이다. 
 
한다(旱多)의 풍토

비가 많이 와도 돌섬은 물기를 품어주지 않아 금방 밭머리에서부터 먼지가 날리는 가뭄(旱多)이 든다. 그래서 여성들은 가뭄 든 밭이 불안하여 바다로 나갔다. 가뭄이 잠녀를 키워내었고, 그 잠녀는 가뭄을 막으려고 온 힘을 다했다. 잠녀들과 그 아비들은 가뭄을 이기려고 바다의 듬북(해초)을 밭으로 날랐다. '돗통시(돼지우리)'의 똥거름과 마소똥도 밭에 뿌렸고,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물기를 보존하려고 밭에 널려 있는 작은 자갈돌을 치우지 않았다. 일부러 자갈들이 땅의 습기를 누르도록 놔둔 것이다. 이것을 '지름작지(기름자갈)'라고 한다. 가뭄은 해안가 마을을 구성하는 데도 일조했다. 해안가 마을은 왜구들의 침범으로 번번이 피해를 입었지만 그래도 해안가는 용천수가 용출하여 생활용수로는 부족하지 않았다.  해안가로 가 바다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알뜨르 마을을 형성했고 밭농사와 수렵·목축하는 사람들은 웃뜨르 마을을 이루었다.

허벅은 물을 운반하기 위한 옹기그릇이다. 목이 좁고 배가 불룩하여 먼 거리를 등짐으로 나르기에 적합하다. 허벅은 나이에 맞게 물을 길어 올 수 있도록 크기가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여성들은 허벅을 지고, 아침저녁으로 물때에 맞춰 해안가에서 물을 길어 온다. 웃뜨르에서는 봉천수를 먹거나 나무에서 흐르는 빗물을 항에 받아 생활용수로 삼았다. 작은 섬에서는 지붕에 내리는 빗물을 받아먹었다. 가뭄은 옹기문화를 탄생시켰다.

▲ 도대불
마다(馬多)의 풍토

말은 진상용으로 길러지고 그것을 키우는 사람들은 테우리의 괴로움을 참아야 했다.

말 목장은 제주도 전역에 걸쳐 10소장(所場)으로 나눠져 있다. 제주·정의현 경계에서 한라산으로 연결되는 산장(山場) 세 군데는, 침장(針場), 상장(上場), 녹산장(鹿山場)이 있었다. 말은 예로부터 제주 삼다(三多) 중 하나로 각광을 받았다. 고려시대부터 말 목장이 성행하여 국영목장으로 관리되었다.

박지원은 탐라말이 조랑말이 된 이유를, "우리나라가 이토록 가난한 것은 대체로 목축의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목장으로 가장 큰 곳은 탐라뿐이다. 그곳의 말들은 모두 원나라 세조가 방목한 종자듷이다. 400~500년을 두고 내려오면서 종자를 한 번도 갈질 않은 까닭에, 애초에는 용매(龍媒)·악와(渥?)와 같이 우수한 종자라도 결국 과하(果下)·관단(款段)과 같은 꼬마 말이 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다" 

제주에는 초지가 발달하여 말의 사육에 좋은 평원이 곳곳에 있다. 말의 사육을 위해 잣담을 쌓아 도망을 가지 못하도록 구획을 지었다. 말들이 밭의 곡식을 먹지 못하게 방책 한 것이 밭담이다. 오늘날 밭담은 대단한 장관을 이룬다. 마을마다 공동목장이 있어 겨울을 제외하고는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마소들이 길을 메웠다. 사람들은 마을 공동목장까지 가는 길 양옆으로 기다란 돌담을 쌓아 마소들이 고개를 내밀어 곡식을 먹지 못하도록 하였다.   

말갈기가 토산품이 되고, 말총으로 망건과 갓을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여 한양에서는 제주 갓의 인기가 높았다. 말가죽은 신발이 되기도 하고 생활용품 곳곳에 중요한 재료로 사용되었다. 민중들은 배고프면 말을 잡아먹고 도망을 가기도 했고, 말을 잡아먹다 탄로 난 사람들은 받아 곤장을 맞고 육지로 죄를 살러 떠났다. 말은 사대부에게는 좋은 동물이나 그것을 키우고, 육지로 나르는 민중들에게는 골칫덩어리였다. 어느 시대건 말을 타고 누리는 자들은 편리함만을 생각하므로 그 말이 어떻게 키워졌는지 모른 채 모양과 빛깔만을 따지고, 기르는 자들은 타는 즐거움을 모른 채 압박당하는 고통만을 감수해야 했다. 내가 길렀으나 내 말이 아닐 때, 말은 계급과 신분을 갈라놓는 지표가 된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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