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41> 진상보고서 위원회 심의①

   
 
  20002년 5월 북촌주민학살사건 현장 조사를 벌이는 4·3위원회 위원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필자(왼쪽). 사건 체험 주민 3명 건너서 한광덕·박재승 위원이 서 있다.  
 
고건 총리 "소위 심의 후 재논의" 제안에
강금실 장관 등 "오늘 통과시키자" 주장

진상보고서 위원회 심의①
4·3진상조사보고서 심의를 위한 4·3위원회 전체회의가 2003년 3월21일 고건 국무총리 주재로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국무총리실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날 회의는 50여년 동안 어둠 속에 묻혀왔던 4·3의 진상을 정부가 공식 인증하느냐 여부가 달려 있어 초미의 관심을 모았다.

이 회의에 앞서 보고서 채택을 반대하는 보수진영의 움직임도 있었다. 장성 출신들의 모임인 성우회는 3월18일 고건 국무총리에게 "4·3진상조사보고서가 공산폭도에 의한 무장폭동이었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 민중항쟁으로, 군경의 진압작전은 국가폭력으로 규정함으로써 국가의 정통성과 군의 명예를 손상시킬 수 있는 중대한 오착을 내포하고 있다"면서 객관적인 검증이 내려질 때까지 심의를 유보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전달했다. 당시 성우회 회장은 제주도지사를 지낸 김영관 제독이 맡고 있었다.

국방부는 물론이거니와 군경이 추천한 민간인 위원인 김점곤·한광덕 장군, 이황우 동국대 교수 등도 반대 입장을 보였다. 특히 국방대학원장을 역임한 소장 출신의 한광덕 장군은 밤을 새워가며 보고서의 내용을 일일이 분석한 뒤 성우회 홈페이지에 비판하는 글을 올리는 등 가장 열심히 반대활동을 벌였다. 그는 4·3위원회 활동 기간에도 일반적 수준을 넘어서는 강성 발언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한 위원은 2002년 3월15일자 「조선일보」 인터뷰 기사에서 "4·3위원회에 회의 자료를 제공해야 하는 진상조사기획단이 4·3사건을 민중항쟁으로 보는 재야측 주장만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밝혀 파장을 일으켰다. 그때는 기획단에서 자료 수집 발굴에만 힘을 쏟고 있을 때였지 수집 자료의 해석이나 사건의 성격을 판단하는 일은 착수조차 않은 상태였다. 이에 따라 박원순 기획단장 명의로 한 의원에게 "발언 근거가 무엇이냐"고 공식 질의했지만 답변은 없었다.

2002년 5월31일 4·3위원회 위원들이 4·3 당시 2연대 군인들에 의해 민간인 300여명이 학살된 '북촌리 사건' 피해자들의 증언을 청취한 일이 있다. 사건 현장을 목격한 3명의 주민으로부터 당시 상황을 듣던 한 위원은 난데없이 "학교 운동장에 주민 1000여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소대나 중대 병력이라면 대항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져 주민으로부터 "어떻게 맨손인 주민들이 총을 든 군인들에게 대들 수 있느냐"는 핀잔의 소리를 들었다.

한 의원은 진상조사보고서 심의를 하기 위해 2003년 3월21일 4·3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린 날에도 4페이지에 이르는 '진상조사보고서 안 검토 소감'을 발표했다. "진상조사보고서가 아니고 군경의 과잉 진압과 무장폭동의 정당성을 가설로 세우고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쓰여진 피해보고서로 보였다"는 게 그의 소감이다. 그는 이어 진상보고서 의결을 유보할 뿐만 아니라 집필진의 구성과 감독 체제에 중대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감사원의 감사를 제안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진상보고서를 심의하는 4·3위원회 전체회의에서는 박원순 기획단장으로부터 보고서 초안의 골자에 대한 설명이 있은 후 이런 주장들이 나오면서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회의는 2시간 동안 진행됐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이에 고건 총리가 소위원회를 구성해 심도있게 검토한 후 일주일 후에 전체회의를 열어 재논의하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일부 민간인 위원들이 "오늘 결론 내자"면서 반대의 뜻을 나타냈다. 여기에 장관들도 덩달아 동조하는 이색적인 현상을 연출했다.

특히 제주 출신 강금실 법무장관은 법적 절차 등을 제기하면서 "또다시 회의를 열어봤자 똑같은 얘기만 나올 것이기 때문에 오늘 당장 보고서를 통과시키자"고 강한 톤으로 주장했다. 여기에 김화중 보건복지부장관이 가세하면서 민간인 위원들 앞에서 총리와 여성 장관들 사이에 입씨름이 벌어지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과거 군사정권이나 권위적인 정부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고건 총리가 "일주일만 기다려 달라는 것"이라고 재삼 설득하면서 소위원회를 구성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소위원회 회의는 총리가 직접 주재하되 위원으로는 국방장관·법무장관·법제처장 등 정부측 각료 3명과 김삼웅 전 대한매일 주필, 김점곤 경희대 명예교수, 신용하 전 서울대 교수 등 민간인 위원 3명이 위촉됐다. 여기에 박원순 기획단장, 김한욱 지원단장, 양조훈 수석전문위원 등이 배석하는 구조였다.

보고서 심의를 위한 소위원회 제1차 회의가 사흘 뒤인 3월24일 국무위원 식당에서 열렸다. 그런데 예기치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 총리실에서 나종삼 전문위원도 참석시키라고 통보해온 것이다. 중령 출신인 그는 전문위원실에서 국방부 입장을 대변하는 쪽이었다. 내용을 알아본즉, 국방장관이 그의 참석을 적극 요청했다는 것이다.

☞다음회는 '진상보고서 위원회 심의' 제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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