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45> 진상보고서 언론 보도

   
 
  2003년 3월3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진상보고서 관련 기사 중 일부. 종전 보도 성향과는 달리 큰 제목도 "최대 3만명 희생…47년 3·1절 발포사건이 도화선"이라고 적절하게 달았다.  
 

조선·신동아, 조사결론·피해상황 상세 보도
중앙지들 "인권 침해 규명 역점" 의미 부여

진상보고서 언론 보도
2003년 3월 29일, 비록 "6개월 동안 수정의견을 받는다"는 조건부 단서가 달렸지만, 4·3위원회에서 진상조사보고서를 채택하자 중앙언론들이 일제히 이 사실을 크게 보도했다. 중앙지들은 4·3사건 발생 55년 만에 정부 차원의 첫 종합보고서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고, 특히 국가공권력에 의한 주민 희생 등 인권침해 여부를 규명하는데 역점을 뒀다는 점에서 평가받고 있다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3월31일자 「한겨레신문」은 "해방공간에서 이념갈등이 개입된 유혈사태에 대한 정부 차원의 첫 공식보고서라는 의의를 지닌다", 「중앙일보」는 "국가공권력에 의한 불법사건으로 규정했다", 「동아일보」는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하게 주민들이 희생된 사건으로 규정했다", 「경향신문」은 "4·3 와중에 희생됐다는 이유로 '빨갱이'이라고 손가락질 받아온 희생자 유가족들의 반세기 신원을 해주려 했음을 명확히 했다", 「한국일보」는 "희생자 유가족의 신원을 위해 정부가 과오를 인정하는 사과를 하도록 노무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고 각각 보도했다.

진보·보수 성향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중앙지가 진상조사보고서 채택을 비중 있게 다룬 것이다. 그 중에서 눈길을 끈 보도는 보수언론의 대표 격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신동아」의 대서특필이었다. 두 매체의 관련 보도기사 중 공통적인 표현은 '단독입수'라고 표기를 한 점이다.

물론 진상조사보고서 전체 내용은 그때까지도 '대외보안을 요하는 사항'으로 다뤄졌다. 심의과정의 불가피한 조처였다. 4·3위원회는 진상조사보고서 채택 직후 보도자료를 통해 보고서 주요골자와 대정부 건의안을 설명했고, 보고서 전체내용은 수정·유인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1개월 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보고서가 정식 채택되면서 적지 않은 기자들이 4·3위원 등을 통해 보고서 내용을 입수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두 언론은 특집으로 이 내용을 다룰 의도에서 '본사 단독입수'란 표현을 쓴 것 같다.

3월 31일자 「조선일보」는 중앙일간지 중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해 진상조사보고서 관련 보도를 했다. 이례적으로 보고서 조사결론의 전문(全文)까지 실었다. 큰 제목도 "최대 3만명 희생…47년 3·1절 발포사건이 도화선"이라고 적절하게 달았다. 종전에 '공산폭동론'에 비중을 두어 4·3에 접근하던 태도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비틀기도 없었다. 또한 박스 기사를 통해 진상조사보고서의 4·3사건 성격 규정, 공권력의 잘못, 피해자 수, 대정부 건의안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평소의 「조선일보」 보도 성향과 비교해 봤을 때 그때 왜 그런 보도를 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5월1일자로 발행된 월간지 「신동아」(통권 524호)는 한 술 더 떴다. "그간 '남로당 무장봉기'에 가려졌던 군·경 및 우익단체의 양민학살 진상이 밝혀졌다. 진상조사보고서 전문을 단독입수, 피로 얼룩졌던 광기의 역사를 고발한다"는 글로 시작한 특집기사는 보고서의 조사결론 전문뿐만 아니라, '피해상황'의 주요내용을 상세히 보도했다.

진상조사보고서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정부 보고서로는 이례적이다 싶을 만치 피해상황이 세밀히 기록돼 있다. 피해상황은 보고서 총 540쪽(자료편 제외) 중 169쪽이 실려 있는데, 주로 체험자들의 증언들로 엮어졌다. 4·3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는 그런 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신동아」가 이 대목을 주목한 것이다. 정부 보고서에 이런 시시콜콜한 피해내용을 일일이 기록할 수 있느냐고 문제 제기할 수도 있는 사안인데, 오히려 이것을 중요하게 여겨 상당 부분을 발췌, 소개했다. 특히 그 가운데는 토벌대에 의한 피비린내 나는 학살극뿐만 아니라 잔혹한 성적 가해상황도 있었는데, 그걸 그대로 보도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보도한 「신동아」의  대표 제목은 "피가 튀고 살이 찢긴 광란의 살육극…2만5000 생죽음 육성증언"이었다.

돌이켜보면, 4·3진상조사보고서는 그후 극단적인 보수세력으로부터 헌법소원, 행정소송 제기 등 숱한 시련과 도전을 받았다. 그런데도 굳건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피해상황' 기록이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생각이나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피해 기록을 보면서 4·3문제를 이념논쟁으로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제주지역 방송이나 신문들도 이 사안을 크게 보도했을 뿐만 아니라 저마다 특집기획을 연재했다. 「제민일보」는 '4·3을 일구는 사람들' 기획연재를 통해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기까지 헌신했던 사람들과 진상규명의 역사를 소개했고, 「제주일보」는 '4·3사건 진상보고'란 타이틀로 보고서 내용을 중심으로 주요 사안에 대해 재구성을 했다. 「한라일보」는 '4·3 진상보고서 채택 이후'란 기획연재를 통해 남은 과제를 시리즈로 점검했다.

☞다음회는 '진상보고서 대통령 반응'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