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48> 보고서 수정의견 심의①

   
 
  4·3진상조사보고서는 모두 3차례 간행됐다. 왼쪽부터 2003년 2월의 초안과 4월 발행된 진상보고서, 그리고 수정의견을 반영한 최종본이 그해 12월에 발간됐다.  
 

앞서 논란된 성격·용어 수정요구 대부분
총리실, 예상 밖 보고서 심의일정 서둘러

보고서 수정의견 심의①
제주4·3위원회는 진상조사보고서를 의결하면서 6개월 이내에 새로운 자료나 증언이 나타나면 추가 심의를 거쳐 보고서를 수정한다는 조건부를 달았기 때문에 수정의견 제출기간을 설정해서 공고했다. 즉 2003년 5월1일부터 9월28일까지를 의견 수렴기간으로 정한 것이다.

이에 앞서 4월말에 「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500부를 발간, 관련 기관·단체 등에 배포했다. 이 보고서에는 발간사나 부록 등은 싣지 않았다. 수정의견을 반영한 최종본 제작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본문만 실었음에도 보고서는 582쪽 분량으로 두툼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4·3진상조사보고서는 모두 3차례 간행됐다. 2003년 2월말에 초안이 나왔고, 4월말에 진상보고서가 인쇄됐다. 그리고 수정의견을 반영한 최종본이 그해 12월에 발간된 것이다.

4·3위원회는 진상보고서를 발간, 배포했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보고서 전문을 위원회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수정의견을 제출할 때에는 반드시 그런 의견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나 증언록을 첨부하도록 못박았다. 위원회 의결과정에서 수정할 수 있는 조건은 '새로운 자료나 증언이 나타나면…'이란 단서였기 때문이다.

그해 9월말까지 모두 20개 기관·단체·개인으로부터 376건의 수정의견이 접수됐다. 예상했던 대로 새로운 자료나 증언에 의한 수정의견은 별로 없었다. 기획단이나 위원회 회의에서 치열하게 논의됐던 성격 규정이나 용어에 대한 논란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첨부자료도 미약한 편이었다.

즉 국방부·경찰청·참전단체연합회·제주경우회 등 군경측은 과잉진압 중심으로 서술한 편향된 보고서라고 문제 삼으면서 '공산폭동론'과 남로당 중앙·북한·소련과의 관련성을 규명하고, 과장된 희생자 숫자를 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유족회와 4·3관련단체들은 군경 및 미군의 책임문제 서술이 미흡했고, '초토화작전', '학살' 등의 용어 부활, 학살책임자 명단 공개 등을 요구했다.

수정의견을 가장 많이 낸 곳은 보수연합단체인 '자유시민연대'였다. 무려 91건의 수정의견을 제출했다. 그런데 이 수정의견은 필자와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한 나종삼 전문위원(중령 출신)이 주로 작성한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됐다. 그는 그해 10월 보고서가 최종 확정되자 이에 반발, 사표를 제출한다.

국방부도 54건의 수정의견을 제출했다. 이 역시 '무장봉기'를 '무장폭동'으로, '초토화'를 '폐허화'로 수정하라는 식이었다. 필자가 보기엔 너무 어이없는 수정의견도 있었다. 1947년 3월1일 제주읍 관덕정 앞에서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한 사건과 관련해서 "공포 쏜 것이 건물 벽 맞고 유탄되어 사상됐다"는 내용으로 수정하라는 주문도 있었다. 나중에 심의할 때 내가 "유탄으로 6명 사망, 6명 중상이란 표현이 국방부의 과학적인 분석인가?"고 따져 물은 적이 있다.

수정의견에 대해서는 1차로 전문위원실에서 분석해 검토 자료를 작성했다. 수정할 부분과 수정할 수 없는 부분으로 구분했다. 그에 합당한 근거를 제시했음은 물론이다. 주로 김종민 전문위원이 검토 자료를 작성했다. 수정의견 376건에 대해 일일이 분석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도표로 만들었다.

검토 자료 작성은 이틀간 꼬박 밤샘작업으로 했다. 그 이유는 첫째, 대부분의 수정의견들이 마감날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특히 보수단체의 수정의견이 대부분 마감날 들어왔다. 두번째는 예상 밖으로 총리실에서 추가 심사 일정을 서두르는 바람에 이틀만에 검토 자료를 작성해야만 했다. 수정의견에 대해 구체적인 반론과 검토 의견을 써야했기에 그 분량이 많아 두권으로 나누어 제본했다.

총리실이 서두르게 된 사연은 이렇다. 그해 3월 4·3진상조사보고서를 심의할 때 총리실의 태도는 보고서 통과를 부담스러워하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6개월 조건부 의결 구상도 그런 분위기를 방증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때 분위기로 봐서는 6개월 후라도 보고서가 최종 확정될 것이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궁리 끝에 그해 10월말에 제주도에서 열리는 제2회 제주평화포럼과 연계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당시에는 평화포럼을 제주발전연구원에서 주관하고 있었다. 필자는 발전연구원 고충석 원장에게 제주평화포럼에 참석하는 노무현 대통령이 4·3에 대한 정부 입장을 발표하도록 하는 방안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고 원장은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다.

당시엔 제주평화포럼 업무는 청와대 외교안보실에서, 4·3관련 업무는 정무수석실에서 담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제주발전연구원 쪽에서 외교안보실로, 4·3진영에선 정무수석실로 이 방안을 건의했다. 그러자 유인태 수석-장준영 비서관-기춘 행정관으로 이어지는 정무 라인에서 적극성을 보였다.

그해 9월 청와대 정무수석실은 10월말 열리는 제주평화포럼에 대통령이 참석해 가능하면 제주4·3에 대한 정부 입장을 발표할 예정이니 그 이전에 진상보고서를 최종 확정했으면 좋겠다는 지침을 총리실에 시달했다. 이러한 지침 때문에 총리실의 걸음이 예상보다 훨씬 빨라진 것이다. 

☞다음회는 '보고서 수정의견 심의' 제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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