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제주파(派)’> 14. 예술인 정은혜

중산간에 터 잡고 미술치료·놀이 연계 힐링 프로그램 시작
자유로운 '섬 예찬'…거스르기보다 맞출 주 아는 제주 강조

사실 그렇다. 예전엔 변변한 장난감 하나 없이도 하루 종일 밖에서 뒹구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1년 365일, 아니 그 보다 더 많은 시간을 자연과 부대끼면서 스스로 노는 법을 깨쳤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오늘'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아이들은 어떨까. 세상을 돌고 돌다 운명처럼 제주 중산간에 자리를 잡은 '예술인' 정은혜 작가의 실험은 그렇게 시작됐다.

▲ 예술인 정은혜.

# '노는 법' 바로 아는 것이 치유

"그냥 '놀자'는 말이었는데, 아이들에게 그 것이 그렇게 큰 고민이 될 줄을 몰랐어요"

미국 현지에서 학위를 받고 실제 현장에서 정신 치료를 했던 정씨의 귀국은 자신감으로 시작했다. 일단 경험이 있던 만큼 잘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그러나 아이들과 만나면서 하나 둘 이가 빠지기 시작했다. 놀이할 거리를 쥐어주기 전까지, 아니 '지금부터 무엇을 어떻게'라는 답을 제시하지 않으면 도통 놀 줄 모르는 아이들에게서 심하게는 '좌절감'까지 맛봤다.

제주에서도 미술치료를 시작으로 여러 가지를 시도했다. 예술시장 등에 참여해 심리 치유에 효과가 있는 문양을 그리는 체험도 진행해봤고 '치유 인형 만들기'같은 그룹 프로그램도 꾸렸다. 여기서도 '놀이'를 모르는 고정관념과 부딪혔다. '논다'는 말에 무의미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듯 한 느낌을 노출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방법을 설명하고 실행에 옮기게 하는 과정은 계획보다 많은 공을 필요로 했다.

정씨는 "다른 곳과 달리 제주는 그런 점에서 자유롭고 저항이 덜 할 거라 생각했다"며 "자연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법을 공유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 일환이 최근 시작한 '세바 Create(크리에이트) 창작 프로그램'이다. 아직 지역 내 지명도가 높지 않고 치유와 연계한 프로그램에 대한 거부감도 적잖은 상황이지만 즐거운 실험에 동참하겠다는 사람들이 하나 둘 선흘 동백동산을 찾고 있다.

프로그램이라고 전문적이거나 특별한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뭇조각이며 작은 돌 따위를 가지고 하는 것들이다. 40대 이상이라면 어린 시절 늘 상 하던 놀이의 연장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 섬에서 키우는 '삶의 예술가' 꿈

'미술을 이용한 정서 치료'로 한정하기에 정씨의 역량은 크고 깊다. 화가이자 커뮤니티 아티스트, 생태놀이·미술기획자 등등 '작가'라는 단어가 모자랄 만큼 다양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섬'은 좁고 불편할 수도 있을 터다. 하지만 달랐다.

"섬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라는 게 뭐라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을 것 같다"고 운을 뗀 정씨는 "360도 어디서나 하늘을 볼 수 있고 또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은 섬 뿐"이라며 "물질문명에 때가 덜 묻은, 그래서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는 곳"이라고 정리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기는 하지만 정씨 역시 다른 문화이주민처럼 제주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이내 무너지기는 했지만 그것이 정씨의 생활신조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정씨는 "벌레가 많으면 많은 대로, 제멋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환경에 순응하며 사는 법을 터득하게 됐다"며 "제주의 흐름이란 것이 거스르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맞추며 산다는 것을 제주행을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귀띔하고 싶다"고 말했다. 

'삶의 예술가'를 향한 정씨의 '선흘'변주곡은 아직 오선지 위에 있다. 그 음표가 음율로 바뀌는 날은 그리 멀지 않은 듯 느껴진다. 고혜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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