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50> 보고서 수정의견 심의 ③

   
 
  2003년 10월 15일 4·3진상조사보고서 확정을 선언하는 고건 총리. 그 오른쪽에 우근민 지사가 앉아있으며, 376건의 수정의견이 제본돼 높게 쌓여있다.  
 

고건 총리, 군경 측 반발 속에 의결 강행
정부가 국가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 인정

보고서 수정의견 심의 ③
4·3진상조사보고서를 최종 확정해야 할 2003년 10월15일 아침, 「조선일보」에  "4·3보고서 반쪽짜리 되나"라는 내용이 보도됐으니 난리가 났다. 군 출신 전문위원이 기고한 내용은 제주출신 전문위원들이 진상을 규명하는 보고서가 아니라 인권침해에 초점을 맞춘 한풀이식의 인권보고서를 썼고, 자신의 수정의견이 묵살됐으며, 심사소위원회의 졸속 처리로 잘못된 부분을 수정할 수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이 불똥이 잘못 튀어서 보고서 최종 통과를 막는 상황이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필자는 일단 급한 불을 꺼야 한다는 생각에 '나종삼 전문위원의 조선일보 기고문에 대한 반박자료'를 만들어 총리실과 행정자치부 기자실에 뿌렸다. 그리고 오늘 진상조사보고서 수정안이 최종 확정되면 회의 종료 후 그 결과와 함께 브리핑하겠다고 알렸다. 그래선지 기자실에선 별 다른 파장이 없는 듯 보였다.

오후 5시 정부중앙청사 국무총리실 대회의실에서 제8차 4·3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리기 직전 또 다른 반전이 시작됐다. 상기된 얼굴로 회의장에 들어서던 신용하 위원이 나를 보더니 "오늘 신문에 기고한 전문위원이 누구냐?"고 묻는 것이 아닌가. 수정의견 검토소위원회 주관위원이었던 그는 "소위원회에서 수정의견들을 졸속처리했다"는 기고문 내용에 발끈한 표정이었다.

내가 "군 출신 전문위원"이라고 답하자마자 신용하 위원은 국방장관을 대리해 회의장에 앉아 있었던 유보선 국방차관에게 포문을 열었다. 걸걸한 큰 목소리로 "뭐가 졸속 처리됐느냐?"고 따져 물은 것이다. 유 차관은 검토소위 회의에 두번이나 참석했었다. 갑작스럽게 공격을 받은 유 차관은 "신문 기고문과 나는 무관하다. 왜 그런 질문을 나에게 하느냐?"면서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기고문의 파장은 그걸로 끝나버렸다.

고건 총리가 주재한 전체회의에서 박원순 기획단장이 '검토소위 수정안'을 보고했다. 즉 진상조사보고서 수정의견 376건이 접수됐고, 네차례 검토소위에서 심의한 결과 33건을 수정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수정안에 대해 군경측 민간인 위원들이 한 목소리로 "수정내용이 미흡하다"면서 재심의를 요구했다.

이에 맞서 다른 민간인 위원들은 "6개월을 끌었는데, 새로운 자료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계속 미룰 수는 없다"면서 의결을 촉구했다. 이번에도 강금실 법무장관이 단호하게 즉각 통과를 주장했다. 그러다보니 위원들 사이에 고성이 오갔다.

이 회의가 비공개로 열렸기 때문에 기자들은 회의장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한 신문은 나중에 회의장 분위기를 전하면서 "비공개로 진행된 이날 회의에서 위원들의 고성이 문밖에서도 들릴 정도로 격한 논쟁이 벌어져 진상보고서 채택 여부가 다시 보류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때 고건 총리가 적극성을 보였다. 고 총리는 보고서 서문에 "4·3특별법의 목적에 따라 사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에 중점을 둬 작성됐고 사건의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는 차후 새로운 사료나 증거가 나타나면 보완할 수 있다"고 밝히겠다면서 설득했다. 고 총리는 그래도 군경 측 위원들이 계속 반발하자 "제주도민의 아픔을 치유하는데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면서 위원 다수 의견으로 진상보고서 최종안을 통과시켰다. 그동안의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그날 회의에는 위원 20명 중 17명이 참석했다. 진상보고서 최종안에 대한 의결서에 서명을 받은 결과, 총리 등 12명이 찬성을, 군경 측 민간인 위원 3명이 반대를, 국방부장관 등 2명이 기권 의사를 표시했다.

진상조사보고서 통과 직후 이에 반발해 한광덕 전 국방대학원장과 이황우 동국대 교수 등 군경 측 민간인 위원 2명이 사퇴했다. 아울러 조선일보 기고 등으로 파문을 일으킨 나종삼 전문위원도 사임했다. 이런 반발에도 진상조사보고서 최종 의결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로써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적인 사건임에도 '공산폭동'이란 이데올로기적인 평가에 짓눌려 왜곡되고 뒤틀렸던 제주4·3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이 비로소 확정된 것이다. 그것은 정부가 공식적으로 제주4·3에 대한 인식을 '공산폭동'에서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으로 바꾼 것을 의미한다.

필자는 2004년 제주도의회 발간 「의회보 제19호」에 기고한 '4·3진상조사보고서 채택과 대통령 사과의 의의'란 제목의 글에서 4·3진상조사보고서의 특징과 의미를 다음 다섯 가지로 요약했다.

①제주4·3 발생 55년 만에 정부 차원에서 조사된 최초의 4·3종합보고서 ②사건의 배경·전개과정·피해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다루면서 인권침해 규명에 역점을 둔 보고서 ③국가공권력의 인권유린 등 정부 과오를 인정한 보고서 ④대규모 인명피해를 유발한 초토화의 책임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미 군사고문단 등에 있다고 규정한 보고서 ⑤한국현대사에서 특별법에 의해 과거 역사를 재조명한 최초의 보고서.  

☞다음회는 '4·3보고서 주요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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