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52> 엇갈린 보고서 평가

   
 
  제주4·3평화기념관에 설치된 '역사의 동굴'. 암흑 같았던 터널을 헤치고 진실을 규명했건만 '미완의 보고서'란 평가에 갑자기 허망감이 엄숙해왔다.  
 

4·3진영과 지역 언론은 "미완" 평가 절하
대통령 사과표명 발표 후 분위기 달라져

엇갈린 보고서 평가
2003년 4·3진상조사보고서가 최종 확정되자 그 평가는 엇갈렸다. 당초 예상대로 보수진영은 즉각 반발했다. 군경 추천 민간인 위원들이 이에 반발해서 사퇴한데 이어 진상조사보고서를 인정할 수 없다는 성명이 잇달았다.

특히 경우회 제주도지부와 자유수호협의회 등 제주 도내 12개 반공단체들은 10월28일 지역 언론에 "내란을 은폐한 4·3진상조사보고서 우리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제목으로 대형 광고를 실었다. 내용인즉, 4·3사건은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기 위해 남로당이 일으킨 내란인데, 진상조사보고서는 이를 간과한 채 군경 토벌대의 과잉 진압부분만 과대 포장했고, 수정안 심의도 엉터리로 진행했다는 것이다.  

이런 불만 표출은 시작에 불과했다. 보수단체들은 2만여명의 서명을 받아 진상조사보고서 취소를 위한 청와대 청원을 하는가 하면 2004년 7월에는 자유시민연대 등 43개 보수단체가 연대해서 진상조사보고서 취소를 위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그들은 이때 18만5689명의 서명지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자세히 다루겠다.

그런데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4·3진영의 반응이다. 2003년 3월 진상조사보고서가 조건부 통과될 때 환영 일색이던 4·3진영이 보고서의 최종 통과 시점에 이르자 환영과 평가 절하로 양분되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그동안 진상규명운동에 큰 몫을 해왔던 제주4·3연구소 등이 4·3진상조사보고서를 '미완의 보고서'로 규정하고 문제 제기에 본격 나선 것이다.

그런 평가 절하는 한라일보사와 4·3연구소 등이 공동 기획한 '4·3진상보고서 성과와 한계'라는 시리즈에서부터 시작됐다. 진상조사보고서 최종 확정 이전인 2003년 9월22일부터 「한라일보」에 연재가 시작된 이 기획물은 보고서의 의미와 성과, 원인과 배경, 성격과 명칭, 미국의 역할, 진상보고서의 한계, 교훈과 과제 등을 다뤘다.

이 시리즈를 보게 되면 '성과'는 별로이고, '한계와 문제'만 부각된 보고서로 전락된 느낌을 받게 된다. 이런 흐름은 진상조사보고서 통과 다음날인 10월16일 제주도기자협회, 제주4·3연구소, 제주민예총이 공동 주최한 '제주4·3운동의 성과와 과제'란 주제의 심포지엄에서도 나타났다.

그러다보니, 4·3진영이나 지역 언론에서는 진상조사보고서가 통일에 대한 열망과 4·3의 성격을 제대로 조명하지 못했고, 미국의 책임과 역할, 대량학살의 전모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 작성 작업에 관여했던 필자 등이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가해자를 은폐했다"거나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한 보고서가 되고 말았다"는 표현 등이었다.

그나마 기자협회 등의 심포지엄에서 고호성 교수(제주대) 등이 지금은 보고서 채택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성과 부분'을 강조하고, 조금 더 있다가 '반성하는 부분'이 거론되는 것이 순서가 아닌가 하는 문제 제기와 그래도 정부 보고서로서 성과가 있었는데 너무 폄하하지는 말자는 의견 개진이 있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위안을 삼기도 했다.

필자도 진상조사보고서가 완벽하게 쓰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보고서 결론에 "이 보고서는 다각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4·3사건의 전체 모습을 드러냈다고 볼 수 없다"면서 추가 진상조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것은 보고서의 한계라기보다는 4·3특별법과 4·3위원회가 갖는 한계이기도 하다. 그 한계와 제약 속에서 최선을 다한 보고서란 평가를 받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보고서 폄하와 더불어 정부보고서가 최종 확정되던 10월15일 제주4·3연구소와 제주민예총, 제주4·3유족회가 공동 명의로 "'미완의 보고서'를 뛰어넘는 '4·3정사'를 새롭게 편찬할 것임을 천명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연구자들은 그렇다 쳐도 4·3유족회마저 보고서 확정 당일에 '미완의 보고서'란 표현에 동조하는데 필자는 충격을 받았다. 갑자기 허망감이 엄습해왔다. 그 허탈감은 오래갔다. 이런 폄하 분위기는 그로부터 보름 후 진상조사보고서 결론에 근거해서 대통령 사과 표명이 발표되면서 수그러졌다.

2006년 제주4·3연구소 이사장으로 취임한 고희범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4·3진상조사보고서가 '미완의 보고서'란 지적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했다.

"국내 역사상 어떤 사건에 대해 정부가 진상을 조사해 보고서를 낸 유래가 없다.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는 그런 의미에서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 속에서 표현과 어휘, 용어들이 제주도민의 입장에서 볼 때 흡족하지 못한 내용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최선을 다한 성과물이다. 미진한 부분들은 차후 4·3평화재단이 만들어진 후 새로 발굴된 것을 추가하고 보완해야 한다. 보고서를 다시 써야 할 정도는 아니다"
이런 평가를 받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은 전문 학자들에 의해 4·3위원회 활동이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공적인 진실규명 및 명예회복의 사례"란 평가를 받고 있다.   

☞다음회는 '노무현 대통령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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