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53> 노무현 대통령 사과 ①

   
 
  2003년 10월28일 제주지역 신문에 광고로 실린 제주도내 12개 보수단체의 성명서. "내란을 은폐한 4·3진상조사보고서 우리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제목을 달고 있다.  
 

보수단체 반발 커…참모진 일부도 반대
청와대, 입장표명 앞두고 현지 여론수렴

노무현 대통령 사과 ①
2003년 10월15일 4·3진상조사보고서가 최종 확정되자 그 다음 화두는 대통령의 사과로 모아졌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미 대선 과정에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 결과 국가권력의 잘못이 드러나면 사죄하겠다고 공약했고, 대통령 취임 직후에 청와대 참모들에게 정부 차원의 입장 표명 방안을 연구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에 대통령 사과가 실현될 가능성은 높았다. 이 업무를 맡은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 구체적인 작업을 하고 있음도 감지됐다. 

제주4·3에 대한 국가원수의 사과라는 꿈같은 목표가 현실로 다가서자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난날 유족들과 만났던 일들이 주마등같이 스쳐갔다. 1988년 4·3취재반장을 맡은 이래 많은 유족들을 만났다. 취재를 마치고 나오는 우리들에게 그들 유족들의 청원은 한결같이 억울한 누명을 벗겨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을 옥죄는, 붉은 색으로 칠해진 이념적 누명을 벗기는 방안은 무엇일까. 우리 취재반은 이심전심으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와 그 결과를 토대로 국가의 사과를 받아내는 것으로 목표를 설정하게 됐다. 
  
1997년 4월2일 제민일보 4·3취재반의 활동상을 국제면 톱기사로 보도한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 기사에서도 필자의 인터뷰를 통해 제주4·3의 궁극적 문제 해결은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와 국가의 사과에 있고, 4·3취재반은 그것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고 밝혔다. '재심' 방안도 검토했지만 개개인이 신청해야 하는 사법적 절차 등으로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녹지 않았다. 제주4·3에 대한 정부 입장 표명이 임박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보수단체의 반발도 잇따랐다. 자유시민연대·경우회 등 중앙 보수단체들이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인한 보고서에 의한 대통령 사과는 있을 수 없다"고 밝혔다. 또 건국희생자제주도유족회·경우회제주도지부·자유수호협의회 등 제주도내 12개 보수단체는 "내란을 은폐한 4·3보고서 우리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면서 정부 차원의 입장 표명에 반대 입장을 보였다.

청와대 내부에서도 국방보좌관실 등 안보 파트에서 "과거 정권의 잘못을 왜 우리가 사과해야 하나", "시기상조다", "전례가 없다"면서 반대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필자가 공직에 발을 디딘 후 곧잘 듣게 됐던 말이 "선례가 없다", "전례가 없다"는 것이었다. 공직사회에서는 일의 추진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선례가 있는 것과 없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정부 조직에서 4·3과 같은 과거사 업무를 하는 일이 처음이고, 과거사에 대한 정부 입장 표명 역시 역사상 처음 하게 되는 일이니 마찰이 빚어진 것이다.

'새로운 길'인 만큼 우리나라에선 참고할만한 자료가 없었다. 따라서 외국 사례를 조사할 수밖에 없었다. 1993년 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하와이 합병 100주년을 맞아 하와이 원주민들에게 피해를 준 사실을 사과한 일, 1995년 대만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이 1947년에 발생한 2·28사건 피해자들에게 사과한 일, 1997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400여년전의 신교도 학살사건에 사과한 일, 2000년 인도네시아 와히드 대통령이 1991년에 일어난 동티모르 양민 학살사건에 사과한 일 등 외국 사례를 정리해서 청와대에 제출했다.

또한 대통령의 사과 표명은 '법률적 행위'에 해당됨을 강조했다. 즉, 4·3특별법 제3조 4·3위원회의 심의사항 중에는 '제주4·3사건에 관한 정부의 입장표명 등에 관한 건의사항'이 있다. 그 법적인 근거에 의해 4·3위원회가 진상조사보고서의 결론을 토대로 4·3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7개항의 대정부 건의안을 채택했으며, 그 가운데 맨 앞자리에 '정부의 사과'가 있었다.

청와대는 앞서 노 대통령이 4·3사건에 대한 정부 입장 표명의 뜻을 밝혔기 때문에 관련된 준비를 해왔다. 정무수석실(수석 유인태)을 중심으로 한 준비 작업은 해외 사례 조사, 현지 여론 조사, 각계 원로 및 전문가의 의견 수렴 등이었다.

10월12~13일 청와대 정무수석실 기춘 행정관과 정책수석실 박진우 행정관 등 관계관들이 제주를 방문, 여론을 수렴했다. 직접적 당사자인 4·3유족회를 비롯한 4·3관련단체와 제주도의회, 경우회·재향군인회 등 보수단체의 사무실까지 직접 방문하며 관계자들을 접촉했다. 정부의 입장 표명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것이다.

4·3에 대한 정부 입장 표명을 제주평화포럼(제주신라호텔)에서 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장소에서 할 것인지에 대한 검토도 진행됐다. 청와대 내 4·3업무를 담당하는 정무수석실과 평화포럼 소관부서인 외교안보실, 그리고 정책수석실 관계관 연석회의에서 4·3 입장 표명을 국제회의인 제주평화포럼에서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의견이 개진됐다. 제주도민의 참여 폭도 제한될 수 있고, 포럼 기조연설에 다른 의제와 함께 4·3을 포함시켰을 때 분명한 메시지가 반감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됐다. 그래서 '제주도민과의 대화'라는 별도의 행사 계획이 추진된 것이다.  

☞다음회는 '노무현 대통령 사과' 제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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