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끼기 위해서는 정치부터 달라져야 한다는 말을 곧잘 한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정치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정치만능사회이다. 아무리 새 천년·새 시대라고 하여 온 국민이 변화를 요구해도 정치가 변하지 않으면 근본적인 사회개혁은 어려운 문제일 수 밖에 없다.

선거법 개정문제도 비근한 예이다. 대통령의 한마디로 재협상을 벌이고 있는 선거법 개정은 정치개혁을 열망하는 국민의지의 소산이다. 국회는 ‘선거구 조정을 위해서는 가장 최근의 인구통계를 적용해야 한다’는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개악을 추진했다.

더구나 4월 총선에 눈 먼 국회는 ‘선거기사 심의위원회’라는 터무니없는 조항까지 신설하기에 이르렀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은 기사는 언제든지 제재를 하겠다는 말이다. 선거구 조정도 경실련의 ‘공천 부적격자’와중에 이뤄졌으니 이같은 후안무치도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정치는 맥가이버 칼처럼 만능일까. 우리들의 선량 299명은 국민 모두의 뼈를 깎는 구조조정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의원수를 줄여야 한다는 요구는 처음부터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정치가 우리 사회 모든 영역에 개입이 가능하고 정치권력에 따라 사회구조가 달라지는 정치만능주의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는 50년의 정치사 속에 민주주의를 표방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실제 정치는 권위주의와 독재로 일관됐다. 사형에 가까운 극형자가 대통령 사면이라는 이름으로 하루아침에 풀려났고 국민들에겐 서슬퍼런 검찰도 법보다 권력 핵심부의 의지가 더 가깝다.

이러한 정치현상은 우리나라의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낳은 병폐이다. 왕과 양반귀족으로 구성된 지배계급의 충효사상이 오늘날의 권위주의적 정치체제를 유지시켜왔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정치는 법치(法治)가 아니라 인치(人治)에 가깝다. 인치주의는 법치주의보다 지배자 개인의 통치력에 따르지 않을 수 없어서 권위주의적 성격을 아니 띌 수 없다. 법치주의가 틀에 짜여진 사회규범에 의해 통치한다면 인치주의는 인간관계를 그 속성으로 하기 때문에 권위주의적일 수 밖에 없다.

수직적 인간관계가 바로 한국정치의 속성이다. 아랫 사람이 윗 사람에게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결례(缺禮)이며 아랫 사람의 요구나 주장은 무시되기 일쑤이다. 또한 우리 사회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왔다.

이처럼 모든 영역에 정치권의 개입이 가능하고 정치권력에 따라 사회구조가 바뀌는 정치만능사회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유권자인 국민들의 의식부터 달라져야 한다.

정치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과 감시만이 정치개혁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정치는 국민들이 가려운 곳을 찾아 긁어줄 것이고 삶의 질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할 것이다.

그래서 정치개혁은 파벌과 패거리가 씨줄과 날줄로 엉킬대로 엉킨 정치권에 기대할 수 없다. 우리 자신부터 달라지는 게 훨씬 쉽다. 이제 우리 사회는 정치가 사회 전체에 개입하여 자신들의 맘대로 끌어가던 시대는 지났다. 한 사람의 통치자를 위해 존재하는 정치가 아니라 국민을 더 무섭게 아는 정치가 돼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낙천·낙선운동은 거스릴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김종배·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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