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신탁통치가 시작되면서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유행처럼 번졌던 속칭 '황퇴(荒退)''졸퇴(猝退)''명퇴(名退)'에 떨었다. 자신의 근무처에서 '황당하게' '졸지에' '명예롭게(?)'쫓겨나가는 강제퇴직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리 오래된 얘기가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 명예퇴직제는 1974년 정부가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처음 시행돼 거의 모든 정부투자기관, 금융기관, 대기업에서 이뤄지고 있다. 이 제도는 당초 '근속 20년 이상 정년 10년 이내' 또는 '정년을 2∼3년 앞둔'사람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기업은 이를 통해 경영합리화를, 당사자는 여유를 가지고 정년 이후 준비 등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계속 연소화 추세에다, 공로보상형에서 최근엔 정리해고제의 성격이 짙어졌다. 다만 정치권만은 명예퇴직의 무풍지대였고 지금도 그렇다.

경실련에 이어 '유권자 심판 운동'을 벌이고 있는 총선시민연대가 최근 공천반대자 66명의 명단과 선정사유를 공개, 파문이 크게 일고 있다. 여기엔 박준규 국회의장을 비롯해 자민련의 김종필 명예총재 등 여야 지도부와 실세 등 중진들이 망라돼 있다. 총선시민연대는 공개된 인물 가운데 공천이 될 경우 낙선운동에 나서겠다고 벼르고 있다. 이를 놓고 정치와 선거문화 개혁을 위한 '시민혁명'이 시작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에선 선정의 잣대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없지 않으나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다. 스스로 개혁을 못하는 '개혁 불능집단'에 대한 당연한 국민적인 응징이란 것이다.

공천반대자로 뽑힌 정치인들은 크게 반발을 하면서 변명을 하고 있다. 자신들의 행적에 대해 부끄러워하거나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선정이 잘못됐다고 강변하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 퇴진하겠다는 사람은 아직까지 없다. 정치권에서 명예로운 퇴진을 기대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 우리의 정치권이 개혁되지 않는 한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하주홍·코리아뉴스국장><<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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