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잠녀] 5부 ‘잠녀’에서 미래를 읽다 -독도 출가 잠녀

▲ 제주 잠녀들이 1953년부터 본격적으로 물질작업을 해왔던 독도 전경.
50년대부터 독도 출가 물질…90년대까지 이어져
잠녀들 기억속 일본 순시선 한 번도 섬에 정박안해
'살고 있음'의 실효적 지배, 영토 선언 이상 당위성

독도 영토 분쟁이 다시 화두다.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이어 런던올림픽 독도 세리모니, 일본의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등 기다렸다는 듯 불편한 말들이 쏟아진다. 하지만 독도는 말이 없다. 아니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독도는 1982년 11월 천연기념물 336호(독도천연보호구역)로 지정돼 우리나라 문화재보호법을 적용 받는다. 최근 의미 없는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늘어났다는 소식이 맘에 걸리기는 하지만 1950년대 독도의용수비대 위령비나 '韓國領' 바위 글씨 같은 상징물들은 독도가 우리땅이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 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독도를 실효 지배했다는 살아있는 증거인 '잠녀'가 있다.

# '실효적 지배' 중심에 서다

정부가 독도를 우리 영토라고 선언했다. '실효적 지배'라는 표현이 오히려 분란을 야기했다는 지적도 있다. 영토분쟁은 근대이후 형성되고 확정된 '국가'라는 체제 아래 소유영토에 관한 뚜렷한 선긋기가 곧 국(권)력과 연결되면서 불거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주인 없이 떠도는 곳들은 여러 협약과 이권에 따라 나눠 갖기를 하거나 약탈됐다.

28일 독립기념관이 공개한 1800년대 일본 문부성 발간 교과서를 보면 이런 일련의 과정이 쉽게 이해가 된다.

이날 공개된 1887년 오카무라 마츠다로가 편찬한 신찬지지(新撰地誌) 2권에 수록된 일본총도에서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에 속한 땅'으로 표기돼 있다. 독도에서 157㎞ 떨어진 오키(隱岐)섬을 비롯한 일본 영토와도 분명하게 구별돼 있다.

1888년 학생용 지도책으로 간행 출판된 '분방상밀일본지도(分邦詳密日本地圖)'에도 오키섬까지만 영토로 표시돼 있다. 1878년 간행된 '일본지지요략(日本地誌要略)'에 수록된 '일본전도'도 마찬가지다.

독도를 영토로 인식한 것은 1905년 러·일 전쟁기에 일본이 독도를 강점하면서 부터다. 하지만 같은 해 문부성에 의해 발간된 지리 교과서에는 독도를 자국 영토로 표시하지 않았다.

문부성이 1905년 발행한 소학지리용신지도(小學地理用新地圖) 맨 앞면에 실린 대일본제국전도에는 류큐의 부속 섬은 물론 1894년부터 식민화한 대만, 일본 북부의 시마(千島) 열도까지 꼼꼼히 일본의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독도는 포함되지 않았다.

국제법의 사례는 영토의 역사성이나 민족문제와 달리 지금 여기의 현재성에 무게를 둔다. 특히 20세기의 여러 협약들과 그것의 실효성은 판단의 주요 근거다. 우리나라는 1948년 정부수립과 더불어 울릉군 남면 도동 1번지를 부여했다. 일본은 뒤늦은 1952년에야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증거 중 하나가 제주 잠녀의 독도 출가 기록이다.

지난 2007년 부산외국어대 김문길 교수는 일본 시네마현의 '다케시마 관계철'에서 1941년 제주도에서 잠녀 16명을 독도로 데려가 일을 시켰고 해산물을 채취하게 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제주잠녀가 독도까지 갔다'는 말을 확인할 수 있는 오래된 서류상 기록은 다름 아닌 '강제 노역'이었다.

보다 분명한 것은 '독도에서 살았다'는 사실이다. '새들의 고향인 외로운 섬'에 1980년대까지 사람 냄새를 나게 한 것도 잠녀였고, 지금 독도를 지키고 있는 이 역시 잠녀다.

▲ 1921년 최초로 독도에 물질을 하러 갔던 제주 잠녀의 모습.
# 아직도 생생한 삶의 기억

아직 독도에 뼈를 묻은 잠녀가 없다고 하지만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 실제 독도에 살면서 지킴이 역할을 했던 잠녀들의 존재감은 대단하다.

제주잠녀들이 1953년부터 독도에 들어가서 물질 작업했던 사실과 실제 살고 있는 주민으로서의 역할은 독도 영토의 실효적 지배를 위한 가장 큰 공헌이라 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1950년 한국 전쟁 이후 혼란한 틈을 타 일본이 독도에 상륙하자 울릉도에 거주하는 민간인들과 울릉도 출신 국방경비대를 주축으로 독도의병대가 조직돼 독도 지킴이(1952~1956)를 자청했다.

제주 잠녀들의 독도 물질도 이 시기를 전후해 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미역이 좋았던 울릉도로 출가했던 잠녀들이 바다밭 분쟁이 덜한 독도에서의 작업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경북일보의 독도 관련 기사를 보면 1953년 최초로 박옥랑·고정순 등 4명과 1954년 김순하·강정랑 등 6명이 독도에서 물질을 했다. 이후 1955년 홍춘화·김정연 등 30여명이 독도 바다에 자맥질을 하는 등 독도 물질이 본격화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 1956년 이후에는 한해에 많게는 30~40명의 잠녀가 독도에 입도해 물질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취재를 통해 만난 잠녀들에게 '독도'는 여전했다. 당시 꽃다웠던 나이도 다 지나가고 깊고 멀리까지 퍼졌던 숨비 소리도 턱 끝에 매달려 그렁그렁해졌지만 독도에 대한 기억만큼은 생생하다.

19살 꽃 다운 나이에 독도 물질에 나섰던 박옥랑 할머니(1953년 독도 입도)의 기억에도 일본 순시선이 나온다. 박 할머니는 "작업을 할 때마다 순시선이 계속 접촉해 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번도 독도 땅을 밟은 적이 없다고 확인했다.

1955년을 전후해 울릉도와 독도를 오가며 물질을 했던 조봉옥 할머니와 임화순 할머니 역시 "배가 너무 고파서 인근을 지나던 일본 경비선에서 건장을 얻어먹기도 했다"는 기억을 털어놨다. 대신 갓 잡은 소라·전복 따위를 줬다. 그래도 독도에서 바닥 잠을 잤던 것은 잠녀들 뿐이었다.

고춘옥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도 일본 순시선이 나온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잘 갖춰진 보급품을 부러워했던 적도 있었다고 했다. 잠녀들이 일본 국적선에 올랐던 것이지 그들이 독도에 발을 디뎠다는 얘기는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았다.
 

▲ (사진 왼쪽부터) 김신열씨 김공자씨 고순자씨
# 영원한 독도 잠녀로 남다

1959년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독도행을 택했던 김공자 할머니(73)의 기억에 까지 독도에서의 생활은 고단함 그 자체였지만 삶의 한 부분으로 단단해져 있다.

올 2월 꼬박 45년 만에 고향 한림읍 한수리를 찾은 김신열 잠녀(75)의 이름 앞에는 독도 지킴이란 수식어가 달려있다. 누구는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누구는 독도에 남은 셈이다.

1960년대 들어서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물통이 있어 빨래며 목욕까지 해도 물이 모자라지 않을 만큼 사정이 나아졌다. 독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간이화장실이며 창고 같은 것도 생겨났다.

제주잠녀들의 독도 물질은 1970년대 양식 미역 등장으로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완전히 발이 끊긴 것은 1990년대 초다.

1973년부터 1991년까지 18년 동안 독도 바다를 헤집었다는 고순자 할머니에 대한 기록은 지난해 경상북도가 제작한 「독도주민생활사」에도 실려 있다. 나잠 형식의 물질이 아니라 잠수구를 이용한 '머구리'작업을 하고 모래를 이고 날라 선착장 계단이며 헬기 계류장을 만들었다는 것이 이전 잠녀들과 다른 점이다.

제민일보 잠녀기획팀 역시 실제 출가물질을 한 잠녀들을 수소문하는 것으로 제주 잠녀들의 독도 물질사(史)를 정리했었다.

「독도주민생활사」에는 1950년대 독도에서 미역작업을 하던 제주 해녀들이 독도 의용수비대원들의 활동을 도왔던 사실과 이후 1970~80년대까지 독도를 생업의 영역으로 하여 독도에 사람이 발붙일 터전을 마련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독도영유권 문제 한 가운데서 '살고 있음'을 확인하는 산증거로 그 가치 평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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