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65> 국방부 「6·25전쟁사」 파동 ③

계속 버티던 군편 관계자 태도 변화 감지
35건 수정 합의…국방부 후폭풍에 시달려

국방부 「6·25전쟁사」 파동 ③

   
 
  국방부가 발행, 배포한 「6·25전쟁사」 제1집 중 제주4·3사건 수정문 표지. 35건을 수정하게 되면서 국방부는 후폭풍에 시달렸다.  
 

「6·25전쟁사」 파동을 둘러싸고 정치권과 4·3진영에서 국방장관의 문책을 요구하던 상황에서 2004년 7월28일 공교롭게도 국방장관이 전격 교체됐다. 청와대는 남북 함정간의 무선교신 보고 누락사건이 불거지면서 조영길 국방장관이 사의를 표명하자 이를 수리하고, 후임 장관에 윤광웅 청와대 국방보좌관을 임명한 것이다.

예비역 해군 중장 출신을 국방장관에 발탁한 것부터 이례적이었다. 여기에는 참여정부의 국방 개혁 의지가 담겨 있었다. 윤 장관이 취임 일성으로 "국방의 문민화는 시대적 명제"라고 강조한 것도 이와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 바로 그 신임 국방장관이 이틀 전 청와대에서 열린 「6·25전쟁사」 파동 대책회의에서 국방부 쪽에 수정 의지를 강하게 피력했던 주인공이다.

우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4·3위원회에서 만들기로 한 「6·25전쟁사」 수정안은 김종민 전문위원이 주로 작성했다. 8월2일 4·3위원회의 수정안을 군사편찬연구소(군편)에 보냈고, 군편은 8월9일 수정안에 대한 검토의견을 보내왔다. 여전히 주요 부분에선 버티기 자세가 역력했다.

8월11일, 군편 회의실에서 양쪽 실무자 회의가 열렸다. 군편에선 최종대 연구부장, 정석균 자문위원, 양영조 박사, 박동찬 연구원이, 4·3위원회에선 필자와 김종민 전문위원이 참석했다. 이에 앞서 가진 군편 안병한 소장과의 티타임에서 필자가 "군편 검토의견을 보고 실망했다. 오늘 회의의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라고 불만을 토로하자, 오히려 안 소장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막상 회의가 시작되자, 군편 관계자들이 전향적 자세로 임하고 있음이 감지됐다. 그럼에도 주요 부분에선 의견을 달리했다. 가장 부딪친 용어가 '무장폭동'이냐, '무장봉기'냐 였다. 아울러 무고한 민간인 희생에 대한 군 작전의 과오를 인정하는 부분에서 머뭇거렸다. 이런 문제는 2차 회의에서 매듭짓기로 했다. 수정작업을 '8월중'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더이상 물러설 수 없다고 배수진을 쳤다.

2차 회의는 8월23일 4·3위원회 사무실에서 열렸다. 결국, 이날 회의에서 논란 끝에 35건을 수정하기로 합의했다. 오류부분 18건, 왜곡·편향부분 13건, 추가내용 4건 등이다. 가장 논란이 됐던 '무장폭동'은 삭제하고, 4·3특별법에 명시된 '4·3사건' 또는 '소요사태'란 용어로 대체하기로 했다. 

추가한 내용 중 중요한 것은, 사건 배경의 하나인 '2500명 검속, 3건의 고문치사 발생', 초토화작전의 실체인 '해안선 5㎞ 이외의 통행금지와 총살 포고문'과 '9연대의 강경작전으로 표선면 토산리 등 여러곳에서 다수의 주민이 희생되었다' 등이었다. 특히, 결론 부분에 종합적인 평가라 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삽입하기로 합의했다. 

"제주4·3사건은 광복 이후 정부 수립 과정의 혼란기에 발생하여 제주도민들이 수많은 인적·물적 피해를 입은 불행한 사건이었다. 당시 미군정과 새로 출범한 정부는 체제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고 토벌작전을 담당한 군·경도 훈련과 경험이 부족하여 도민의 피해를 크게 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이를 고려하여 정부는 사건 발생 50여년만에 인권신장과 국민화합에 기여하기 위해 4·3특별법을 제정하여 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명예회복 조치를 추진하였다"

이날 회의에서는 35건 수정 합의 이외에도, 조만간 '4·3사건 수정문'을 별지로 만들어 「6·25전쟁사」 배포처 모두에게 발송할 것, 「6·25전쟁사」 재발행시 본문에 수정문을 반영할 것, 향후 군편에서 4·3사건을 서술할 때 4·3진상조사보고서를 최대한 참고하여 반영할 것 등을 약속 받았다.

9월15일, 이 수정안은 상부에 보고한 뒤 '군편 연구부장 최종대-4·3지원단 수석전문위원 양조훈'의 서명으로 매듭지어졌다. 11월16일, 배포처마다 발송된 '제주4·3사건 수정문'의 맨 앞장에는 이런 글이 실렸다.

"「6·25전쟁사」 제1집 중 제주4·3사건 수정문은 '제주4·3특별법'과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의 내용과 취지를 고려하여 제주도민의 피해상황을 추가하고 일부 내용을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이 수정문이 나오자 4·3진영은 크게 환영했다. 4·3유족회·4·3연구소·4·3도민연대·민예총제주도지회 등 4개 단체는 11월17일 "국방부의 4·3사건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환영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국방부 쪽은 후폭풍에 시달렸다. '별들의 모임'이라는 성우회를 비롯하여 퇴역 장성들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은 것이다. 이런 후폭풍의 영향인지 얼마 후 현역 대령이던 최종대 군편 연구부장이 군복을 벗었다. 그는 준장 진급이 예견되던 엘리트 군인이었다. 경위야 어찌됐던, 얼마 후 강원도에 있는 국영기업체 임원으로 떠난다는 그의 전화를 받고 필자의 심정이 착잡했다.     

☞다음회는 '4·3수형자 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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