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69> 4·3수형자 심사 ④
2005년 3월17일 수형자 606명 심의안건이 전격 통과된 후 굳은 표정으로 박수치는 모습. 오른쪽부터 박재승 변호사, 이해찬 총리, 김태환 지사, 김삼웅 위원.
배석했던 관료 "이런 사례 매우 드문 일"
수형자 물꼬 트이자 유족들 눈시울 붉혀
4·3수형자 심사 ④
2005년 3월17일 이해찬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제10차 4·3위원회 전체회의, 수형자를 4·3 희생자로 인정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회의 초반에 국방·법무장관이 반대 입장을 표명하자 희생자심사소위 위원장인 박재승 변호사가 나서서 이에 대해 조목조목 반격하고 있었다.
"김춘배씨는 마포형무소에 수형됐던 사람인데, 6·25때 옥문이 열려 나와서 6~7년간 자기 집에서 지내다가 1962년도에 잔여형 집행문제로 체포가 됩니다. '난 군법회의에서 재판 받은 사실이 없다' 해가지고 잔여형 집행에 이의 신청을 하니까 (1963년)군법회의에서 심리 결과 재판 받았다는 자료가 없다, 그래서 형집행 취소결정이 됐습니다.
박상우라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던 사람인데, 희한합니다. 군법회의 재판이 이 사람이 대구형무소로 들어왔다는 날짜보다 더 뒤입니다. 그러니까 형무소 들어온 날이 1948년 12월9일인데, 군법회의는 13일 날 됐다는 겁니다. 군법회의 안받고 어떻게 수형자가 됩니까? 혹시 이게 미결구금 시작되는 날이 아닌가, 그러나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제주에서 군법회의 열리는데 미리 대구형무소에 넣어놓고 제주에서 군법회의를 한다? 그건 당시 교통사정으로 봐서 말이 안되는 얘기입니다. 있을 수 없는 얘기지요. 또 경찰기록을 보면 자기들 조사해 가지고 A는 사형, B는 무기로 해서 올렸지 재판을 한 것은 모른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있는 것은 아까 법무부장관 말씀, '군법회의 명령'이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거 하나뿐입니다. 4282년도, 즉 1949년도 만들어진 군법회의의 명령서라는 것인데 거기에 4281년도 것을 기재하면서 4282년도 용지에다가 두자 작대기 있는 것을 밑에 하나를 그어 지웠습니다. 그것도 정정인도 없어요. 그걸 4281년도 군법회의 명령서 용지로 썼습니다. 그러면 소급했다는 것이 누가 봐도 나타납니다.
또 판결의 내용, 명령서 내용을 보면 피고인 이름은 쭉 있고, '항변'이라는 난이 있는데, 거기에 전부 '무죄' 주장했다는 항변이 나옵니다. '항변 무죄' 이렇게만 써있습니다. 피고인이 그렇게 항변했다는 거죠. 그리고 형량 나오고 죄명 나오고 형무소 나옵니다. 그런 간단간단한 서면입니다.
1948년도 재판이 있었던 날짜가 12월3일부터 27일까지 12번, 1949년도에는 6월23일부터 7월7일까지 10번에 걸쳐서 재판을 했다는 거죠. 1948년도 재판에서 871명을, 1949년도에는 그 짧은 기간에 1659명의 유죄판결을 내렸습니다. 그 수형인 명부에 의하면. 그러면 한번 재판할 때 백몇십명씩 재판했다는 겁니다. 이 피고인들은 하나같이 무죄 주장했다고 나옵니다. 그러면 검찰관이 직접 심문을 하고 그 많은 범죄사실에 항변 다 듣고 증거 조사하고, 나 억울하다 하면 증거 조사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구형하고 최후 진술하고. 이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자료를 갖고 오랜 시간을 걸려서 진상보고서가 작성됐습니다. 진상보고서 461쪽으로 기억합니다만, 거기에 이 4·3 군법회의라는 것은 아무리 자료를 찾아봐도 적법한 절차를 걸쳤다고 볼 자료가 없다, 따라서 '수형인'이라는 말 자체도 부적당하다, 그리고 형무소에 수감한 것은 '불법 감금'이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박재승 위원장은 이 대목에 이르자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판국인데, 그동안 국가가 가지고 있는 자료를 내어 놓으라고 수차례 요구했는데도 없다고 해놓고선 오늘 다시 신중히 하자고 하는데,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인가"고 일갈한 것이다.
박 위원장의 발언이 끝날 무렵 팽팽하던 무게추가 이미 기울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에 쐐기를 박듯 김태환 도지사가 나섰다. 김 지사는 그해 1월 있었던 제주도 세계평화의 섬 선포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4·3을 과거사 정리의 모범이라 하신 말씀이 있었다고 상기시켰다. 김 지사는 "제주도는 이제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나아가고 있고, 제주도 실무위원회에서도 결론 내린 수형자 심의도 이런 정신으로 접근해줬으면 좋겠다"고 발언했다.
회의장은 더이상 반대론자들이 목소리를 높일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날 수형자 606명이 극적으로 4·3희생자로 결정됐다. 수형자 문제의 물꼬가 터진 것이다. 회의장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김두연 회장, 홍성수 상임부회장 등 4·3유족회 임원들은 이 소식이 알려지자 "마침내 구천을 떠돌던 영령들의 원혼이 풀리게 됐다"면서 서로 얼싸안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날 회의에 배석했던 총리실, 행정자치부 등 중앙 관료들도 놀라움을 표했다. 한 관료는 "국무회의에서 실세장관인 법무장관이나 국방장관 중 한사람이라도 반대하면 그 안건은 유보되는데, 오늘 박재승 변호사의 역할이 컸다"고 평가했다. 그것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이란 '권위'에다 철저히 준비된 '진실'이 법무·국방장관의 반대를 압도한 것으로 분석하고 싶다.
☞다음회는 '4·3수형자 심사' 제5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