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70> 4·3수형자 심사 ⑤

   
 
  2007년 4·3위원회에서 군법회의 사형수까지 희생자로 결정하면서 그들이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국제공항 내 유해 발굴사업이 탄력을 받았다. 왼쪽 위가 남북 활주로.  
 

 희생자에 '수형자' 추가한 특별법 개정 도움
 희생자 1만4032명 결정…공항 유해발굴 탄력

4·3수형자 심사 ⑤
2005년 3월 제10차 4·3위원회(위원장 이해찬 총리) 전체회의에서 수형자 606명이 4·3희생자로 처음 결정된 데 이어, 2006년 3월에 열린 제11차 4·3위원회(위원장 한덕수 총리) 회의에서도 수형자 1250명이 희생자로 인정됐다. 여기까지 심사를 통과한 수형자는 징역 20년 이하 해당자였다.

이제 남은 관문은 사형수와 무기수에 대한 인정 여부였다. 희생자심사소위원회에서도 형량이 낮은 수형자부터 심사하다보니, 막바지엔 사형수와 무기수들만 남게 됐다. 심사소위에서 많은 격론이 있었지만, 결국 다수 의견으로 사형수와 무기수도 희생자로 인정하는 안이 채택됐다.

그 이유인즉, 정부 진상조사보고서에서 4·3 군법회의를 불법으로 규정했을 뿐 더러, 4·3특별법의 규정에 따라 '희생자'로 결정하는 것과 형사소송법상의 재심을 통해 무죄 또는 면소를 받는 것과는 별개의 사안으로 보고, 따라서 위원회가 정한 '희생자 제외대상'에 해당하지 않으면 희생자로 결정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불과 사흘만에 345명에게 사형 선고했다고 하나 국내·외 언론에 한 줄도 보도되지 않은 점, 그 시신들을 암매장한 점 등 군법회의를 둘러싼 수많은 의혹들도 이런 결정을 하는데 한몫했다.

여기에다 유족들에게 희소식이 있었다. 국회 본회의가 2006년 12월22일 희생자 범위에 사망자·행방불명자·후유장애자 이외에 '수형자'도 추가시키는 4·3특별법 개정법률을 의결한 것이다. 강창일 국회의원 등이 발의한 이 개정법률이 통과됨으로써 결국 입법부도 4·3 군법회의의 불법성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형수 318명과 무기수 238명을 4·3 희생자로 인정하자는 심사안건이 상정된 제12차 4·3위원회 전체회의는 2007년 3월14일 권오규 국무총리권한대행 주재로 열렸다. 그 회의 직전에 한명숙 총리가 사임하는 바람에 재정경제부 장관을 겸한 권오규 부총리가 총리대행 자격으로 의사봉을 잡은 것이다.

권 총리대행은 사형수와 무기수들이 대거 상정되는 안건이 보고되자 부담을 느꼈던지 사전 브리핑을 요구했다. 그래서 이경옥 4·3지원단장(현 행정안전부 차관보)과 수석전문위원인 필자가 과천 정부청사에 가서 4·3 군법회의에 대한 전반적인 상황과 사형수와 무기수를 희생자로 인정하게 된 심사소위의 심의경위를 설명했다.

회의는 예상보다 쉽게 풀렸다. 물론 회의 중간 중간에 몇차례 고성이 오갔지만, 예전 회의에 비해 그 강도가 낮았다. 국방부와 법무부 쪽에서 장관을 대신해서 차관들이 나와서 반대의견을 피력했지만, 역시 한풀 꺾인 기세였다. 심사소위 위원장인 박재승 변호사가 "아직도 이런 논쟁이 있다니 답답하다. 2005년 수형자들을 4·3 희생자로 인정할 때 군법회의가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은 것을 법률적으로 충분히 검토했고, 진상조사보고서도 그렇게 나온 것이 아니냐"고 질책성 발언을 하는데도 더이상 반박을 못했다.

이에 권오규 총리대행은 "이번 희생자 결정은 실체적 사실접근을 위한 노력의 결과"라고 평가하고, 사형수와 무기수들을 4·3 희생자로 결정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마지막까지 논쟁이 되었던 사형수·무기수까지 통과되자 희생자 심사는 큰 고비를 넘긴 셈이다. 2007년까지 심사를 통과한 희생자는 1만3564명, 유족은 2만9239명으로 집계됐다. 그후 심사가 계속 진행돼 현재까지 인정된 4·3 희생자는 1만4032명, 유족은 3만1253명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신고하지 않은 희생자와 유족들이 있어서 금년 12월1일부터 내년 2월말까지 추가 신고기간이 설정되고 있다.

수형자들을 희생자로 결정하기까지 많은 위원들의 노고가 있었지만, 그 중에도 수훈갑을 꼽으라면 심사소위 위원장을 맡아서 어려운 난관을 헤쳐 온 박재승 변호사일 것이다. 박 위원장에겐 여러 일화가 있다. 2005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그만둔 박 위원장은 미국 스탠포드대학교 방문연구원으로 미국에 가 있었다. 2006년과 2007년 4·3위원회 회의에서 수형자 심사가 있을 때, 우리가 간절히 희망하자 두차례나 귀국하는 열의를 보여줬다. 그것도 자비 부담으로.

박 위원장은 2003년 선거를 통해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에 당선됐을 때 4·3위원회 위원 사임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면 희생자심사소위 위원장직까지 내려놓게 됐다. 우리는 이를 만류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선거 과정에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시 민변 회장인 최병모 변호사에게 SOS를 쳤다. 제주에서 변호사사무소를 개업했던 최 변호사까지 나서서 "4·3문제 해결이 중요하다"고 설득해서 원상회복됐던 뒷이야기가 있다.  

4·3매듭이 풀리기까지 이런 수많은 굽이가 있었다. 사형수와 무기수까지 희생자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4·3특별법의 개정은 새로운 동력이 됐다. 2007년 4·3위원회에서 사형수들을 희생자로 인정함으로써 그들이 암매장됐던 제주국제공항 활주로 옆 유해 발굴도 탄력을 받게 된다. 

☞다음회는 '세계평화의 섬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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