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방희·생활경제연구소장·KBS 1라디오 진행자>

25년만에 제주를 찾은 대학 동창한테 연락이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제주 출신에게 대뜸 하소연부터 했다. "너랑 소주 한 잔 하던 탑동은 다 어디 갔는데?" 무슨 얘긴가 한참 고민했다. 그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대학 시절 제주로 무전여행 왔던 대학 동창들과 탑동에서 술잔깨나 기울였다. 그 곳에서 바라보던 산포조어(山浦釣魚)의 바다는 얼마나 아름답던지.

이제 친구들이 기억하는 탑동은 없다. 1986년 건설부가 임해관광단지 조성을 목적으로 탑동 공유수면 매립을 허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초 탑동 매립의 명분이었던 관광단지는 현실화되지 않았다. 이제 그 곳은 관광객은 고사하고 제주인마저 찾지 않는 곳이 돼버렸다. 제주의 개발 논리를 서투르게 흉내 내며 그 친구를 달래보려 했다. 그래도 전보다 많이 편리해지지 않았느냐고. 그 친구의 답이 제주 오개발(吳開發)의 역사를 새삼 상기시켜주었다. "제주도 와서 (인천) 연안부두 찾을 일 있어?"

탑동이 매립되기 100여년 전 영국 런던에서는 희대의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부랑자와 거지가 모여 살던 그리니치 화이트채플 지역에서 두 달 동안 5명의 매춘부가 무참히 살해됐다. 이름 하여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 사건. 범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도 이 지역은 당시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연쇄 살인 이후 사람들이 찾길 꺼리던 이곳을 일부러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점뿐이다. 저녁 늦은 시간이 되면 전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이 수십명 단위로 짝을 지어 연쇄 살인 현장을 찾는다. 가이드는 살인 현장에서 사건 개요를 실감나게 설명한다. 건물 벽에 당시 기록 사진을 프로젝터로 쏘기도 한다. 이 섬뜩한 공포감을 맞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지불하는 돈은 우리 돈으로 1만5000원에서 4만원에 이른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사건은 뮤지컬과 드라마, 영화로 쉴 새 없이 다시 만들어지고 있다. 런던은 공포와 괴담, 치부마저 비싸게 팔고 있다.

매립 이후 평범해진 바닷가와 사연을 간직한 음침한 골목길, 두 곳의 결정적 차이가 뭘까? 남과 다른 이야기, 바로 스토리다. 스토리(story)야 말로 오늘날 관광산업의 요체다.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야말로 관광 마케팅의 총아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속성 덕에 괴기하고 무서운 사연이 있는 곳마저 관광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이른바 다크 투어리즘 마케팅(dark tourism marketing)이다.

만일 탑동이 매립 전처럼 도심 가운데까지 해안선으로 이어진 곳이었다면 어땠을까? 곳곳에 탐라국 전설이 밴 관광 명소로 발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주는 언제부턴가 한사코 이야기를 던져버리려 한다. 대신 삭막한 아스팔트와 제방, 현대식 건물을 고집한다. 제주가 아니라 다른 어디서라도 볼 수 있는 것들을 팔려고 한다.

그리고 중문관광단지에 있는 '카사 델 아구아'가 멋진 관광 상품이 될 수 있는 것은 사연이 많기 때문이다. 세계 건축계의 거장 리카르도 레고레타(1931~2011)의 작품이라는 이야기는, 이제 그의 유작이라는 전설로 발전하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 한 거장의 눈에 비친 제주의 풍광과 그 건축학적 재해석이라니. 제주를 찾은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그 곳을 찾고 싶어질 것이다.

제주로서는 골칫거리가 아니라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제주도로서는 규정을 들먹일 필요조차 없다. 규정에 쓰인 자구대로만 했더라면 그 논란 많던 탑동 매립이 가능했을 리 없다. 부지 소유주만 해도 그렇다. 해당 부지의 상업성을 높이기 위해 굳이 가치 있는 건물을 허물고 조경을 해야 할까? 현재 서울 도심의 조선호텔이 국내외 이용객들에게 최고인 것은 그 곳 뒷뜰에 원구단이 있기 때문이다.

제주인의 힘과 지혜로 카사 델 아구아를 살려내자. 그 멋진 곳에 또 하나의 사연을 덧입히자. 그렇게 그 곳에 스토리를 쫓는 관광객들을 득실대게 하자. <김방희·생활경제연구소장·KBS 1라디오 성공예감, 김방희입니다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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