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앤팡> 제주미학기행
[김유정의 미학기행 '멋과 미'] 원당사지5층석탑

보물로 지정된 '불탑사5층석탑'명칭 '원당사지5층석탑' 으로 고쳐야
투박하지만 강한 기백, 제주의 전통예술은 변방의 독창성 품고 있어

제주의 보물

우리는 보물하면 서양식으로는 해적선의 금은보화를 떠올리거나, 한국식으로는 흥부 박속 의 금은보화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보물은 단지 돈이나 보석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유물의 가치에 따른 문제이기 때문에 전해오는 무엇이든 보물이 될 수 있다. 만일 허벅이 제주인들의 생명수를 길어 나른 공로가 인정되고, 미학적으로 가치가 있으면 사회적 합의에 따라 제주인의 보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생명수를 담는 아름다운 허벅을 만든 제주의 장인들이 묻히는 우리의 안타까운 현실은, 일본의 비젠야끼를 복원한 장인들이 인간 국보로 인정되는 일본의 현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보물은 역사적인 가치, 문화적이고 미학적인 가치, 그리고 민중적인 가치를 담아내야 한다.

제주에 보물이 몇이나 있을까. 현재 제주에 있는 보물은 4개인데, 보물 제322호 관덕정, 보물 1187호 불탑사5층석탑, 보물 662-6호 탐라순력도, 보물 569-24호 안중근의사유묵(遺墨)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보물 1187호 불탑사5층석탑은 원당사지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한국 유일의 현무암으로 만든 고려시대 석탑이다.

이 원당사지 석탑은 보물로 지정된 이름이 '불탑사5층석탑'이나 정확한 명칭을 말한다면,  '원당사지5층석탑'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탑은 고려시대 원당사의 석탑이었고, 불탑사는 20세기 초에 원당사지에 창건된 절이기 때문에 불탑사의 탑이 될 수 없다. 

▲ 원당사지5층석탑 전경
원당사에 대한 기록

심재(心齋) 김석익(金錫翼, 1884~1956)의 『파한록(破閒錄』 「원당악(元堂岳)」조에, '원당악은 원나라때 기황후가 원당(願堂)을 세워 복을 빌던 곳이다… 봉의 꼭대기에 구지(龜池)가 있고… 옆에는 하늘에 제사하는 기우단(祈雨壇)이 있다… 아래에는 사찰 옛터가 있는데, 석탑 하나가 우뚝이 홀로 있으니, 이는 원나라의 유물이다' 라고 했으나 기록의 출처를 밝히지 않아 근원을 알기 어렵다.

두루 회자되는 이야기에 의하면 원당봉은 3첩7봉으로 천하의 명당이라고 하여 기황후가 이곳에 절을 짓고 태자 낳기를 빌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하나 정확한 기록이 없다. 전설로 볼 때 원나라 절집(元堂)이라기보다는 태자 낳기를 빌었다는 의미로 볼 때 원당(願堂)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기황후는 원나라 혜종(순제)의 제2황후로서 후에 황후가 된 고려 공녀(貢女) 출신이다. 고려의 공녀(貢女)는 고려판 정신대에 가깝다. 공녀는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자, 몽골은 '특정한 일에 종사할 사람', 즉 궁중에서 일을 볼 사람을 뽑아 보내라는 요구 때문에 생겼다. 고려는 이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서 처음 양가집 처녀들을 빼고, 과부, 역적의 아내, 스님의 딸을 뽑아 보낸 것이 1274년(원종 15) 3월이다. 이때 원나라에서 온 사신을 일러 고려에서는 만자매빙사(蠻子媒聘使)라 불렀다. 만자매빙사란, '몽골에 항복한 남송 군인에게 고려 여인을 중매하는 사자'라는 뜻이다. 즉 몽골에 항복한 남송의 군인들을 회유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때 항복한 남송의 장교를 위해 데려간 공녀가 140명이었고, 그 값으로 비단 1,640단을 지불했다고 한다. 이후로도 몽골의 요구는 계속됐고 고려는 처녀 숨기기에 바빴다. 이때 생긴 것이 조혼(早婚)제도였다. 처녀가 결혼을 하려면 관아에 알려야 하는 이상한 법이 생겨났다. 공녀를 몽골에 보내는 것이 중지된 것은 80여년이 지난 1356년 공민왕의 반원 정책에 의해 완전히 철폐되었다(이이화, 2006).      

기황후에 대해서는 『해동역사(海東歷史)』 기록이 상세하다. '올제이 후투그(完者忽都皇后) 기씨는 고려 사람으로, 1339년 황태자 아유시리달라(愛猷識里達獵, 북원의 昭宗, 재위 1370~1378)를 낳았다. 가문이 본디 미천하였는데, 기씨가 황후가 돼 귀하게 됨으로 해서 삼대(三代)가 모두 왕작(王爵)에 추봉(追封)되었다. 처음에는 휘정원사(徽政院使) 독만질아(禿滿迭兒)의 추천으로 궁녀가 되어 차(茶)를 올리는 일을 맡아 혜종(惠宗, 明에서는 順帝라고 함. 재위 1333~1368)을 섬겼다. 

기씨의 시호(諡號)는 보현숙성황후(普顯淑聖皇后)이고, 본관은 행주(幸州), 기자오(奇子敖)의 딸이다. 공녀(貢女)로 원 나라 조정으로 보내져, 1333년 고려 출신의 환관(宦官) 고용보(高龍普)의 추천으로 궁녀(宮女)가 되었다. 기황후가 아유시리달라(愛猷識里達獵)를 낳은 것이 1339년 겨울, 궁녀 신분이었다. 1340년에 정적(政敵)을 제거하여 제2황후가 되었다.'

이를 감안하면 원당사 창건 연대는 황태자를 낳기 전 1338년 이전이 된다. 기씨가 제2황후가 되기 전 궁녀 신분으로 아기(후에 황태자)를 낳았으니 기씨가 궁녀 신분으로 황태자를 낳기를 빌었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 따라서 1339년에 후에 황태자가 된 아유시리달라를 낳기 전이 원당사 창건연대가 되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지금까지 원당사 창건연대는 1300년(제주시 안내문), 1360년 이후(제주도지), 1340년경(김종철, 1995)으로 보는 설이 있다.

실제 기황후와 태자가 관련된 기록은 '기황후가 황태자 아유시리달라를 낳은 후 태자의 미래를 기원하며 은화 3000정(錠)으로 금강산 장안사를 중수하고, 은에 새긴 『대장경(大藏經)』 1부를 기증했다'라는 고려시대 문신 이곡(李穀)의 기록이 전해온다. 또 기황후가 제주와 관련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관덕정」조에, '고려 말년에 기황후가 (제주)에 목장을 두었다'라는 사실이 전한다. 원당사에 대한 조선시대 마지막 기록은 17세기 중반에 저술된 이원진의 『탐라지(耽羅誌)』에 나타난다.    

해발 170m 남짓한 원당악에는 옛날 봉수가 있어서 서쪽으로 별도(別刀) 봉수에 응하고 동쪽으로는 김녕 입산악(笠山岳) 봉수에 응했다. 이 원당악은 제주목 동쪽 17리에 있어 산 위에 못이 있고 그 못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 연못에는 개구리밥, 거북, 자라가 살았다고 전하며 근래에 새 절간이 못 너머에 자리를 잡고 있다.

또 원당사지에 터를 잡은 불탑사 앞에 천태종인 원당사(元堂寺)가 있어 원당사지5층석탑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을 헷갈리게 한다. 3첩7봉이라는 말에 걸맞게 원당봉 기슭은 보기보다는 그윽하고 은밀하여 3개의 절간이 자리잡고 있다. 

▲ 원당사지5층석탑에 새겨진 안상무늬
제주 현무암 탑의 미학  

한눈에 보아도 원당사지5층석탑은 작고 단촐한 모습이다. 주변을 눈여겨보면 고려·조선시대에 걸친 도자기편들이 노출되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의 절터임을 알 수 있다. 탐이 있는 공간은 녹색의 대나무로 둘러져 있어 고즈넉하다. 제주의 문화재들은 크기가 작다. 그림도, 석상도, 탑도, 초가도 나지막하고 작다. 아무리 다른 말을 찾으려고 해도 제주 문화유산들을 지켜보면 딱 걸 맞는 말이 바로 '?아도 아지방'이다. 자연의 바람이나 역사의 바람이 세차도 그것을 견뎌내는 힘이 있는 당찬 맵시가 제주 문화의 본질이라면 본질이다.

원당사지 5층석탑도 바로 작지만 기백이 있는 품새라고 할 수 있다. 탑은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으로 이루어져 있다. 통돌로 만든 몸돌은 기둥과 면석으로 조립된 육지의 탑들보다 단조롭지만 단순하고 간결한 것에서 오는 기백이 역력하다. 옥개의 낙수면은 완만하고 전각(轉角)의 네 귀퉁이는 살짝 들려져 하늘을 가리킨다. 옥개석은 층단 받침없이 단일면으로 처리했다. 복발 위의 장식은 소실됐다.  

원당사지5층석탑 1층 탑신 남쪽 면에 작은 사각의 감실(龕室:불상을 모셔두는 방)을 만들어 놓았다. 원래 이 감실은 부처의 진시사리(眞身舍利)를 보관하는 곳이었으나 탑이 늘어나게 되면서 진신사리가 부족하자 금은 장식의 사리함에 불경을 넣어 보관했다. 불탑은 고대 인도어로 스투파라고 하는데 원래는 무덤을 의미했다. 파리(巴里)어로는 투파라고 한다. 이 말이 중국에서 솔도파(率都婆), 수두파(數斗波), 탑파(塔婆) 등으로 음역 되었고, 이를 줄여서 '탑'이라고 하였다(소재구, 1994). 한국의 탑은 4세기에 목탑으로 시작되었다가 보존이 어려워지자 7세기경에 석탑으로 바꿨다. 돌의 영원성을 의식한 때문이었다.

신라의 탑은 화려하면서도 웅장하다. 백제의 탑은 우아하면서도 고상한 기운이 감돈다. 고려의 탑은 신라를 계승하면서 점차 절제된 모습을 보인다. 제주의 탑은 현무암 특유의 재질로 인해 세부적인 묘사를 피하고 있어서 투박하지만 자연스럽다. 그러면서도 그 자연스러움은 당찬 기백의 운치를 내보이는데 제주 현무암의 탑은 그런 점에서 어느 탑보다 더 개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투박하지만 강한 기백이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제주의 전통예술은 변방의 독창성을 품고 있다. 예술학·미술평론가

▲ 사자빈신사지석탑(獅子頻迅寺址石塔)의 안상무늬(기단부)
원당사지5층석탑 기단은 뒷면을 뺀 나머지 3면에 양각으로 새겨진 안상(眼象) 무늬 안에 다시 연꽃 봉우리처럼 솟아나도록 한 무늬가 음각되었다.

안상무늬(眼象紋樣)는 말 그대로 '코끼리 눈' 모양의 무늬를 말한다. 이 무늬는 인도에서 발전하여 한국의 통일신라 이후 탑, 부도, 불상 대좌의 기단부 등에 주로 새겨졌다. 코끼리가 부처를 모시는 상징적인 동물이니, 기단부에 새겨지는 것은 바로 부처님을 보좌하는 코끼리의 역할을 염두에 둔 것이다.

안상무늬는 점차 연꽃 무늬와 혼용돼 나타나다가 대칭의 연꽃무늬로 대체되었다. 충북 제천군 한수면에 있는 고려시대 사자빈신사지석탑(獅子頻迅寺址石塔)에는 안상무늬가 탑의 장식으로 새겨졌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를 계승하고 있어 안상무늬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탑의 기단 4면에 안상무늬가 3개씩 나란히 새겨졌는데 무늬 안쪽에 잎과 줄기가 돌기처럼 양각으로 처리되었다. 탑신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부처의 상징이라면 기단의 안상무늬는 코끼리가 되어 부처를 받드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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