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준 제주대학교 건축학부 교수·논설위원

   
 
     
 
세계에서 가장 못살지만 가장 행복한 나라가 있다. 방글라데시다. 우리나라 행복지수는 60위권이지만 방글라데시는 한동안 1위였다. 단순하게 비교하면 우리나라 소득수준이 방글라데시보다 30배 높지만 행복지수는 60배 낮은 것이다. 문화수준은 어떨까.

1962년 방글라데시의 수도인 다카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제 막 시작된 국회에서 의원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회의 안건은 국회의사당 신축이었다. 이들이 원했던 것은 최고의 국회의사당 건물이었다. 민의를 대변하는 건물을 최고의 작품으로 만들어 항상 국민들의 뜻을 존경하기 위함이었다. 나랏돈이 없어도 존경받는 건축 작품으로 국회의사당을 짓고자 하는 이들의 열망이 회의장에 가득 찼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최고의 건축물로 국회의사당을 짓는 가였다. 그 누구도 좋은 아이디어를 내지 못했다. 이들이 내린 결론은 결국 자신들보다 넓은 세상을 경험한 유학파 청년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이었다. 예일대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청년, 마즈하룰 이스람은 국회의원들에게 그 당시 가장 유명한 건축가 세 명을 추천했다. 그 세 사람은 르 코르뷔제, 알바 알토, 루이스 칸이었다.

세 명의 건축가를 추천받았지만 의원들의 고민은 더 깊어 갔다. 이 건축가들을 잘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의원들은 국가기관인 공공사업국에 이 세 명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아오도록 지시했다. 그 후 돌아온 공공사업국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명료했다. 르 코르뷔제는 지는 해이고, 알바 알토는 아프고, 루이스 칸은 뜨는 해라고 답을 했다.

명료한 답변만큼 결론도 간결했다. 의원들은 있는 예산을 모두 끌어 모아 당시 뜨는 해인 루이스 칸에게 설계를 맡기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1962년 다카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국회의사당 건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내전과 함께 질병과 가난이 이들 곁을 떠나지 않았다. 국가예산도 새로운 국회의사당을 지을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사당만큼은 최고의 건축물을 지어야 한다는 신념은 변하지 않았다. 온갖 역경과 시련을 거치고 1983년이 돼서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은 수도인 다카에 건설됐다. 국회의사당 하나를 짓는데 무려 21년의 세월이 걸린 것이다. 이 건물을 설계한 루이스 칸은 자신이 설계한 이 건물의 완공도 보지 못하고 1974년 세상을 떠났다. 과연 이런 일을 우리나라에서는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1962년 시작돼 1983년에 완공된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은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힌다. 이 건축물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예방주사를 맞아가며 방글라데시 다카를 찾는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에게 자국에서 최고의 건축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이구동성으로 이 국회의사당을 꼽는다. 1962년의 국회의원들의 바람처럼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건축물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국회의사당은 방글라데시보다 6년 늦은 1968년 시작되었다. 나중에 출발하였지만 안목은 훨씬 뒤쳐졌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우리나라 국회의사당. 과연 이 국회의사당을 보기위해 먼 나라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관광객은 있을까.

제주에는 먼 곳에서, 먼 나라에서 일부러 찾아와서 보고 가는 건축물이 있다. 서귀포시 중문에 있는 작은 집, 더 갤러리 카사 델 아구아이다. 이 작은 집이 이제 그 누구의 손에 의해 없어질 위기에 처했다. 이 작은 집을 마지막 작품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난 리카르도 레고레타는 이 시대 최고의 건축가였다. 만약 21년을 기다려준다면, 참아낸다면, 견딜 수 있다면 이 작은 집은 제주의 자랑이 될 것이다.

1962년 그 어느 날 다카에 모였던 사람들의 안목을 우리는 가질 수 없을까. 이 사람들보다 가진 것은 많을지 모르지만, 문화에 대한 기다림과 열정이 한없이 모자란 것이 현재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의 씁쓸한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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