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영 조세정의네트워크 동북아챕터 대표·논설위원

   
 
     
 
한류스타가 운영하는 음식점을 비롯해 곳곳이 유행과 멋이 넘치는 도산공원 일대를 거닐다 보면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살아 신산한 삶이 죽어서 후세대의 풍요 속에서 제 자리를 못 찾는 느낌이다.

물론 한국의 후세대가 기억하는 도산은 말쑥한 개화기 신사풍 옷차림에 대공주의라는 고매한 사상을 한반도를 넘어 태평양과 대서양을 가로지르며 펼치신 분으로 당대에 앞선 시대를 사셨기 때문에 사후의 안식처 또한 그 분의 명성에 걸맞은 게 아닌가 느낄 만도 하다.

그러나 필자는 도산 선생을 1902년 결혼 후 도미해 샌프란시스코와 리버사이드, 로스앤젤레스 등을 거치며 살아낸 이주노동자로서의 안창호와 그의 가계사를 통해 인식한다. 고학하며 가계를 꾸리는 동시에 독립협회, 국민회, 흥사단 등을 태동시켰던 미국 체류 당시 그는 사회의 최하층에서 유색 이민노동자로 살았다.

십 수년 전 남가주대 동아시아 도서관 전자문서고에서 미주한인사의 '보석 같은' 자료들은 들춰보던 중 맞닥뜨렸던 도산과 그 가족의 일상사를 잊을 수가 없다. 그의 가족이나 한인단체들이 제대로 보관할 수 없어 미처 분류도 하지 못한 채 미국 주류의 문턱 높은 사립대학에 맡겨버린 그 자료들 속에서 드러난 도산은 나름 말쑥한 지식인 면모로 차려입은 옷차림으로 남가주의 뙤약볕 밑에서 오렌지를 수확하고 있었다. 어렸을적 귤 수확철에 자주 보던 보자기를 어깨로부터 옆구리까지 가로질러 맨 채 노동자 무리에 섞여있는 도산에게서 아득한 향수와 연민을 느꼈다.

사실상 자력갱생해야했던 그의 자녀들의 삶도 핍진한 것이었다. 빌리 할러데이 보다 앞선 세대였던 둘째 딸 수라가 곡마단에 가까웠던 순회 재즈공연단의 일원으로 겪어냈을 삶을 여기서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어린 나이에 쇼 비즈니스 세계로 흘러들어간 수라가 혁명 전 큐바의 한 클럽에서 뮤지션들 틈에 끼어 노래를 하던 장면이 담긴 흑백 사진이 그녀의 삶을 통째로 드러내고 있었다.

생계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영화에 투신한 장남 필립은 나름 할리우드 황금기를 대표하는 아시아계 배우로서 입지를 다졌다. 툭 불거진 광대뼈에 볼품없는 외모를 하고 있었으나 중국과 일본계 배역을 소화하던 배우 중 당대 최고였다. 아마 그와 동시대에 스타덤에 오른 바 있는 중국계 여배우 애나 메이 왕과 함께 할리우드 스타들이 여흥을 즐기던 클럽 코코넛 그로브를 드나들던 몇 안 되는 백인이 아닌 배우였을 것이다. 그런 그 조차 아버지 도산의 명성에 누가 될까 한국에서든 미국의 한인 커뮤니티에서든 철저히 묻혀 있었다. 할리우드 명성의 거리에 이름을 올린 1세대 배우이면서도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의 유명 평론가나 영화학도들에게서 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들 이외에도 아들 둘과 딸을 하나 더 둔 도산의 가계에서 그의 유지를 이어가는 차세대는 외손자 하나에 불과하다. 그나마 히스패닉계인 그는 한국말을 하지도 못할뿐더러 외모 또한 이질적이다. 한미 양쪽에서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그에게 도산의 삶을 재조명 해낼 수 있는 역량을 기대하기에는 역부족인 것이 사실이다.

도산이 설립해 미주한인독립운동의 기반이 된 대한인국민회의 실상은 더욱 씁쓸하다. 남가주대 인근에 있는 기념관은 운영 주체를 둘러싼 갈등으로 방문객들의 외면을 받고 있으며, 단체 자체도 역사적 맥락을 잃어버렸다. 업데이트 없는 영문일색의 국민회 홈페이지(http://koreannationalassn.com)는 흡사 버려진 묘지와 같은 느낌을 준다.

필자가 도산과 그의 가족사 일면을 들추어 낸 것은 다가오는 세밑에 제주인으로서 지난날과 다가오는 날들에 대해 잠시 새김질을 해보려 함이었다. 지금 개방과 발전의 앞선에 위치한 제주에서 앞 세대의 삶은 오늘의 풍요 속에 윤색돼 박제된 채 남겨져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다가오는 날들에서 그 박제된 기억들조차 희미해져 간다면, 제주인의 원형질 또한 도심 속의 섬 도산공원처럼 뿌리 뽑힌 채 남겨질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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