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당선인은 부모를 모두 흉탄에 잃고 정치계에 입문하기까지 18여년 동안 은둔에 가까운 삶을 살아온 '비운의 여성' 이미지가 강하다. 정치적으로는 한나라당을 위기에서 두 번이나 구해낸 구원투수로 '위기에 강한' 이미지를 다져왔다.

 
◇퍼스트레이디 직무대행 그리고 은둔
박근혜 당선인은 1952년 대구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1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9살 되던 해 선친인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이던 박정희 소장이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지만 서울의 외가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성심여중에 입학하면서 뒤늦게 청와대 생활을 시작했다.
 
1974년 서강대학교(전자공학 전공)를 졸업한 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지만 6개월 만에 육영수 여사의 갑작스런 서거로 귀국, 1974년부터 퍼스트레이디 직무대행을 했다. 그는 이 당시를 "비록 제 꿈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때부터 저는 국가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게 됐다"고 회고한다.
 
박 당선인은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청와대 생활을 접고 동생들과 함께 신당동 사저로 돌아갔다. 박 당선인은 당시 전두환 합수부장으로부터 9억원(후에 3억원은 돌려줌)을, 1982년에는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으로부터 300평 규모의 성북동 자택을 받았다.
 
이후 사실상 '은둔' 생활을 시작한 박 당선인은 육영재단과 '박정희·육영수 기념사업회', 1994년 인수한 정수장학회 운영에 몰두했다. 그러나 육영재단 운영권을 둘러싸고 동생들과 치열한 다툼이 시작되면서 폭력사태와 5촌 조카 살인사건 등이 발생하는 등 잡음이 일어나기도 했다.
 
◇1998년, 정계입문…구원투수 등판
박근혜 당선인은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나라당에 입당해 이회창 후보 대선캠프 고문을 맡으며 정치계에 입문, 이듬해 대구 달성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는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대구 달서구에 출마했고, '정치인 박근혜'로 다시 태어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2001년 이회창 총재가 당 개혁안을 거부하자 이에 반발해 탈당하고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지만 대선을 앞두고 다시 한나라당과 합당했다.
 
미래연합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이던 2002년 5월12일 북한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1시간 동안 단독회담을 했다. 새누리당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정치인은 박 당선인이 유일하다.
 
박 당선인은 2004년 3월 한나라당이 불법 대선자금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위기에 처하자 당 대표를 맡아 당 쇄신작업을 진행, 이른바 '천막당사' 시대를 열었다. 한나라당은 이에 힘입어 4·15 (17대) 총선에서 121석을 확보했고 박 당선인은 잠재적인 차기 대권주자로 발돋움했다.
 
한나라당 대표 시절 2005년 12월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사학법을 직권상정해 처리하자 곧바로 장외투쟁을 선언, 3개월 만에 사학법 재개정 논의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친이-친박 갈등 딛고 두 번째 구원투수로
박근혜 당선인은 2006년 5월20일 지방선거 유세 도중 피습을 당하면서 정치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일을 계기로 당시 열세였던 선거 분위기가 우호적으로 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스스로 이 이후를 "덤으로 얻은 제2의 인생"이라고 말했다.
 
박 당선인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 출마, 이명박 당시 후보에게 석패하자 전문가들로부터 개인수업을 받으며 정책을 가다듬고 현장을 다니면서 절치부심했다.
 
그는 경선방식 등 논란에도 불구하고 깨끗이 승복함으로써 차기 대권주자로서 입지를 확실히 다졌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친이(친이명박)계와 친박(친박근혜)계 간 갈등이 본격화된 시점이기도 했다.
 
친이-친박 갈등은 18대 총선 공천에서 대거 탈락한 친박계가 대거 탈당해 '친박연대'를 창당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박 당선인은 한나라당에 남았지만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며 친이계를 강도높게 비판했다. 이후 친박계 정치인들의 한나라당 복당을 꾸준히 요구, 친박계 60여명의 복당을 관철시켰다.
 
박 당선인은 2011년 10·26 서울시장 보선 패배로 당이 어려움이 처하자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다시 구원투수로 나섰다. 그는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당 체질개선에 나섰고 4·11 총선에서 과반 152석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가 일명 '선거의 여왕'임을 다시한번 입증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 7월 대선 경선에 재도전해 12월19일 대통령에 당선됐다.
 
박근혜 당선인은 "제 삶이 개인의 삶 대신, 국민과 함께 가는 공적인 삶을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저에게 국민은 늘 가족이었다"며 "국민들의 삶과 애환을 듣고,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제 인생의 가장 큰 가치였다"고 자신의 인생을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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