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주 봉성교회 목사·논설위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반지가 하나 있었다. 이 반지는 특별하다. 소유한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세 아들이 모두 훌륭한 자질을 갖추었기에 어느 하나에게만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아버지는 몰래 반지를 두 개 더 만들어서 아들들을 하나씩 불러서 진짜 반지라며 나눠줬다. 아들들은 저마다 자기가 선택된 상속자라고 생각했다. 후일 그들 사이에서 누가 진짜 반지를 가졌는지를 따지는 추잡한 싸움으로 번졌다. 결국 재판정에서 해결하려 한다. 판사는 행복과 존경을 안겨준다는 반지의 능력을 상기시키고 반지에 그런 능력이 있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반지의 힘을 믿지 말고 오로지 자신의 선한 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의 존경과 칭찬과 사랑을 얻도록 힘쓰라고 충고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중세시대에 많은 이야기를 수록한 데카메론에 등장한다. 나중에 계몽주의 시대에 레씽이 더 발전시켰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세 종교가 대립하던 십자군 전쟁시대를 배경으로 씌어진 '성자 나탄'이라는 희곡에서였다. 관용을 모르고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풍자하면서 진정한 평화는 어디에서 오는가 묻고 있다. 내 생각만을 옳다고 우겨대며 다른 생각을 품은 사람들을 적대시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절대반지는 욕심이 클수록 점점 무거워진다. 이를 가벼이 여기고 집착하지 않는 품성을 가진 사람만이 이를 누릴 수 있고, 관리할 자격을 갖는다. 참으로 모순된 이야기지만 공감이 간다. 그러나 이러한 지혜도 우리의 현실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권력이나 부를 향유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애쓰는 것을 두고서, 어느 코미디언은 이렇게 탄식한다. "있는 사람들이 더 하네"

대통령선거를 치르면서 우리나라는 더 큰 분열의 국면에 들어선 듯하다. 지역과 경제력, 게다가 세대 간의 반목이 겹쳐지면서 극심한 갈등이 노출되고 있다. 해결하기 어려운 남북관계와 더불어 새로 출범할 정부는 큰 짐을 떠안고 출발하는 셈이다.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좋은 정책을 수립하고 믿음직스럽게 추진할 것을 기대한다. 하지만 불안함은 도처에 도사라고 있다.

크리스마스 아침을 맞는다. 평화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탄생을 온 세상이 함께 기뻐하며 축하하고 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으나, 권력자에게 쫓기어서 이집트로 피난해야 했다. 나사렛에서 가난과 어려움을 일상으로 겪으면서 성장했다. 그리고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죽음으로 자신의 생명을 던졌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당대 사람들이 기대하던 메시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삶이었다.  불세출의 용맹함과 전투력으로 로마의 폭정을 제압하는 다윗왕의 재현과는 거리가 있었다. 기대하던 지도자의 역할을 그는 거부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임 당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그는 선택했다. 이를 진리와 지혜로 받아들인 사람들에 의해서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복음으로 전해졌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길이 순수하게 지켜지기보다는 왜곡되거나 굴절된 형태로 교회를 지배해온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뜻을 좇는다면서 오히려 대척점에 서 있는 경우도 많았다. 

나와 너, 우리들과 너희들의 대결 구도를 벗어나려면 제3의 길을 찾는 수밖에 없다. 제압해 굴복시키는 것이 평화의 길이 아니지 않는가. 끊임없이 다수가 공감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소명이라 본다. 근래에 발견한 어느 글이 이를 잘 말해준다. 더불어 살기에는 좁은 학식보다 넓은 상식이 낫고, 팍팍한 지성보다 온유한 인성이 낫고, 빗나간 영성보다 반듯한 품성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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