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웅 자비정사·논설위원

   
 
     
 
오늘날의 세상은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는 아전인수 격으로 혼자만의 이익과 안위를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앞으로만 내어 달리며 살아가는 현실이다.

이러한 시절에 불기 2557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해 부처님의 가르침인 자비사상을 더욱 생각나게 한다. 자비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남는 것을 남에게 베푸는 동정이나 일반적인 사회활동인 봉사와는 구별돼야 한다. 자비란 자기에게만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않으며 모든 이기와 탐욕을 떨치고 모든 중생을 자신과 평등하게, 아니 자신의 한 몸으로 보고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자(慈)란 본래 우정(友情)에서 연유하며, 주종관계가 아닌 대등한 관계에서의 사랑을 뜻한다. 내가 가진 기쁨과 부와 권력을 내 이웃에 나누어 줌으로써 나누어 갖는 것을 '자'라 한다. 비(悲)란 본래 연민(憐憫)에서 연유하며 함께 가슴아파하는 것, 고통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이웃의 고난과 고통과 무기력을 나누어 받음으로써 나누어 갖는 것을 '비'라 한다. 자비란 모든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 가지려는 자기 본성에 그 근본을 두며 끊임없는 사랑과 대가를 바라지 않는 자기희생 속에서 타인과 일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자기 개인의 이익과 고통 속에서도 주저하거나 위축됨이 없이 모두와 함께 하려는 평등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지금 내 주변에 고통을 받는 사람이 있고, 어떠한 면으로든지(권력·재물·명예) 내가 남보다 행복하다면, 현재 나의 기쁨은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내가 힘들게 일하지 않고 편히 살 수 있는 것은, 나보다 힘들게 일하면서도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비의 나누어 가짐은, 내가 가진 기쁨과 부는 본래 내 것이 아닌, 즉 나에게 맡겨 둔 이웃의 것을 돌려주는 당연한 나누어 가짐이다(慈). 또한 이웃의 고통과 가난은 본래 내 것을 이웃이 대신 짊어지고 있으므로 돌려받는 당연한 나누어 가짐이다(悲).

자비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하지만 그 중 '비'가 더 적극적인 사랑을 뜻한다. 가진 것을 나누어 주기는 쉽다. 그러나 고통에 동참하기는 어렵다. 이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다. 그래서 '대비 관세음보살' 이라고 한다. 고통을 나누어 짊어지려면 대단한 용기와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자비행은 불세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밖으로는 대중에게 항상 유연한 자세와 품성을 가져야 한다. 무한한 포용력을 지니지만 자신에게는 계행에 의한 엄격한 절제를 요구한다.

이처럼 자비란 이론이 아니다. 오직 실천될 때만이 그 의미를 갖는다. 자비란 탐욕과 이기로 인한 불평등과 차별 속에서, 너와 나의 분별을 끊고 평등성을 실현함으로써 온 중생이 함께 해방되는 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 있으면서 세상을 거스른다. 젊은이들만이 이 거슬러 가는 진리를 볼 수 있다.

싯다르타 태자가 그랬고 예수가 그랬다. 왜 예수는 거대한 사원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지 않고 황야에서 기거하는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사막에서 깨달음을 얻었는가? 왜 싯다르타 태자는 호화로운 왕궁에서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한갓 걸식하는 사문에게서 진실을 듣고 고통의 현장으로 내려오게 되었는가?

이 시절이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겉으로 나를 드러내는데 앞장서고 나만의 영화와 즐거움만을 구하기보다는, 비록 음지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한이 있어도 남을 도와주기 위해 애쓰고 함께 살아가고자 내 한 몸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아직까지는 세상에 많다는 것이다. 세상은 만물이 존재하되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도와주며 모든 것을 보듬어 안아주는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처럼 남을 배려하고 보살피며 양보함으로써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함께 더불어 지낼 때라야 비로소 살만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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