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수 이중섭미술관 명예관장·미술평론가·논설위원

   
 
     
 
'휘영청 달 밝은 밤에'하면 한국인이면 누구나 가슴 벅차오르는 감회를 느낄 것이다. 그만큼 둥근 달은 한국인의 정서의 공감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꽉 차는 아름다움, 더없이 밝고 은은한 아름다움이 만월 외에 또 있을까. 만월은 매달 찾아오지만 유독 정월 대보름과 추석의 보름달을 떠올리게 된다. 한 해를 시작하는 감격과 한 해의 수고를 거두어들이는 넉넉함을 상징하기 때문일 것이다.

달을 모티브로 한 조형물로 조선시대 달항아리를 들 수 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자기는 백자인데 그 가운데서도 둥근 달을 닮은 '달항아리'는 세계 어디에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자기이다. 한국인들은 중천에 뜨는 보름달을 방안에도 두고 싶어서 달항아리를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보름달같이 환하다'란 말은 원만하고 밝고 아름답다는 표현이다.

백자 항아리를 그림으로 많이 다룬 화가로 김환기와 도상봉이 있다. 이들 외에도 옛 기물을 배치한 고풍한 정물의 소재 가운데는 으레 백자항아리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김환기는 1950년대 초반부터 그가 뉴욕으로 떠나기 전까지는 산, 달, 백자, 매화, 새 등과 같은 한국인의 정서에 밀착된 소재를 주로 다뤘다. 그 가운데서도 달과 백자항아리를 많이 그렸고 때로는 겹치다시피 했다. "항아리만을 그리다가 달로 옮겨진 것은 그 형태가 항아리처럼 둥근 달이어서 그런지도 모른다"고 한 말에서도 달과 항아리의 관계가 흥미롭게 피력돼 있다. 항아리이자 동시에 달이기도 한 관계로서 말이다.

김환기는 해방 전부터 항아리를 사 모았는데 온통 집안이 항아리로 채워져 사람들이 항아리집이라고 부를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항아리를 그리다가 달로 옮겨 왔다는 것은 단순한 소재의 이동이 아니라 둥근 백자와 둥근 달이 애초에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었다는 정서에서 가늠된다.

화가들 가운데 옛 기물을 좋아하고 수집하는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옛 기물이 지니는 조형적인 완숙미. 우리만이 지니고 있는 정감에 대한 매료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애완품으로, 감상의 대상으로 수집하는 것과 그것이 지니는 미의 실체를 자신의 조형의 영감원으로 하는 것은 수집의 차원이 다르다. 김환기는 아마도 옛 기물이 지니는 아름다움의 요체를 자신의 조형의 원천으로 삼으려고 한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의 백자예찬을 들어보자.

"나는 아직 우리 항아리의 결점을 보지 못했다. 둥글다해서 다 같지 않다. 모두가 흰 빛깔이다. 그 흰 빛깔이 모두 다르다. 단순한 원형이, 단순한 순백이, 그렇게 복잡하고 그렇게 미묘하고 그렇게 불가사의한 미를 발산할 수가 없다. 고요하기만 한 우리 항아리엔 움직임이 있고 속력이 있다. 싸늘한 사기지만 그 살결에는 다사로운 온도가 있다. 실로 조형미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과장이 아니라 나로선 미에 대한 개안은 우리 항아리에서 비롯했다고 생각한다. 둥근 항아리, 품에 넘치는 희고 둥근 항아리는 아직도 조형의 전위에 서있지 않을까."

세잔이 그린 사과는 실제의 사과보다 더 사과답다고 한 말이 있다. 그처럼 도상봉이 그린 달항아리는 더 달항아리답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주로 둥근 달항아리에 개나리니 안개꽃이니 수국과 같은 꽃을 가득 꽂은 정물을 많이 그렸는데 그 단순한 구도의 완벽함과 격조는 말할 나위도 없지만 꽃을 담은 백자항아리는 실물보다 더욱 실물다운 면모를 보인다. 이토록 정확히 백자의 아름다움을 구현해낸 예는 아직은 없다.

둥근 보름달을 보고 그것을 흙으로 빚을 줄 알았던 옛 한국인들 못지않게 그것을 자신 만의 세계로 가꾸어갈 줄 알았던 현대의 화가들 역시 한국의 정서, 한국의 아름다움의 실체를 제대로 추구했다는 점에 일치된다. 둥근 팔월 한가위의 둥근달을 보면서 오늘날에도 누군가 저 환하고 완벽한 아름다움을 화폭에 새길 줄 아는 미술가들이 나왔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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