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순환 드라마 제작사 ㈜러브레터 대표이사·논설위원

   
 
     
 
추석(秋夕). 지난주는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이었다. '가을(秋) 저녁(夕)'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을 지닌 이 명절은 농경시대의 유산이기도 하고, 유교 문화의 정수이기도 하다. 한 해의 추수를 감사하고, 조상을 기리는 연례행사이기 때문이다.

추석은 형식적으로는 '의식'(ritual)이지만, 내가 느끼기에 그것은 '기억'(memory)의 창고이자 공장이다.

대부분 만나본 적도 없고, 기억나지도 않는 조상들의 묘를 돌아보고, 차례를 지내는 것은 '의식'의 차원이지, '기억'과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길든 짧든, 기뻤던 슬펐던, 기억의 편린들을 공유하고 있는 가족, 친지들과의 만남. 그것이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기억'을 강화한다. 우리들은 '의식' 때문에 모이지만, 정작 모이는 것은 함께 한 '기억'들이다.

볼 살은 더 들어가고, 주름은 더 깊어진 부모님과 친척 어른들의 얼굴을 대할 때, 그 분들이 젊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세월의 풍화작용을 애달파한다. 어느 틈에 총각, 처녀 냄새가 나는 자녀나 조카들을 보면서, 그들이 발가벗고 물놀이를 하던 지난날을 기억하곤,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옛날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는, 기억에 아련해하고, 현실에 가슴아파한다. 문득,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처럼 과거의 갈등이나 불상사가 상기돼 미간이 찌푸려지기도 하고, 듣고 싶지 않은 잔소리가 또다시 재생될 때에는 지난 추석의 불쾌한 추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추석은 '과거'를 잊지 않고 있음을 증명하고 '과거'를 기억하게 만들지만, 추석은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 추석은 만남의 자리에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낸다.

2013년의 어머니의 모습을, 그 여위었지만 아직은 정정한 어머니의 모습을, 사진 찍듯이 머릿속에 남기고 싶어 한다. 언젠가는 대면하지 못할 그 얼굴을. 추석은 부쩍 커버린 아들이, 사촌들과 '블루마블'을 하면서 재잘거리며 노는 장면을 유쾌한 만화 영화의 한 컷으로 프린트한다. 그리고 남편의 고집 때문에 친정을 찾지 못한 채, 음식을 장만하고 청소를 하는 아내의 안쓰러운 모습을 가슴 먹먹한 드라마의 한 신(scene)처럼 각인시킨다.

추석은 그런 '기억'들을 잉태하고, 생산해낸다. 이 새로운 기억들도 시간이 흐르면, 오래된 흑백영화처럼 화면에 비가 내리고, 흐릿해지겠지만 어쨌든 그것들이야말로 우리들 인생의 기록이자, 인생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과거의 기억'에 얽매인 채 만나고, 만나서는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면서 추석을 보낸다. 그리고 조상들이 그러했고, 후손들이 그러할 것처럼, 하늘 높이 떠 있는 보름달을 바라보며 기원한다. 잘 살게 해달라고, 모두가 건강하게 해달라고. 그것은 추석이 우리들에게 건 마법 같은 주문이고, 우리는 추석이기 때문에 그 같은 주문을 마법사처럼 읊조린다.

하지만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과거의 기억이 슬프면 어떻고, 새로운 기억이 즐거우면 어떤가? 좋든 싫든, 그런 기억들이 없다면, 우리는 없을 것이고, 우리는 만나지 않았을 것이고, 만나서도 할 말이 없거나, 말을 해도 감정이 생기지 않을 것을.

만약, TV 드라마에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기억 상실'이 우리 모두를 덮친다면, 우리의 추석은 어떻게 될까? 때론 모든 것을 잊고 싶기도 하고, 어떤 기억만이라도 잊혀졌으면 하고 바랄 때가 많지만, 정작 우리의 기억들이, 가족이나 친지와 함께 했던 기억들이 없어진다면, 추석은 아마도, 누가 누군지 모르는 결혼식장에 와서 갈비탕이나 국수를 먹고 가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추석에 감사한다. 그런 추석을 만들어준 조상님들이 고맙고, 앞으로도 그런 추석을 이어갈 후손들이 복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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