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 시인·논설위원

   
 
     
 
그해였다. 문득 찾아온 해방 이듬해. 거친 바람 속에서도 언젠가 고국의 미래를 위한 씨앗을 심어야 했다. 모국어를 잃어버린, 식민지를 살아내야 했던 조선인들의 후세들을 위해서였다. 그렇게 민족학교는 출생했다. 그는 무엇보다 교육의 힘을 믿었다. 여기에 여성의 역할은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 땅에서 탄생한다. 오사카의 민족학교 백두학원 건국공업고등학교와 건국여자고등학교는.

한국과 일본 모두 혼란의 해방공간, 그는 비장했다. 가진 것 없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해 방황하던 젊은이들과 검은머리 흰머리 되도록 변치 말고 산업부흥을 이루자고 손을 잡았다. 백두동지회였다. 신촌 조규훈(1906~2000), 그의 시대였다. 그리고 그는 뒤에서 자금만 댔다.

열일곱 소년이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었으나 유년기에 세상 떠난 부모, 남은 소년은 배움에 고팠다. 학교 문전만 맴돌다 맴돌다 눈물을 삼키던 소년은 현해탄을 건넜다. 지독한 고향의 가난, 너도나도 일본으로 떠나던 식민의 시기였다. 소년에겐 잠자는 시간도 아까웠다. 일본 고베에서의 재봉일. 야학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밤10시까지라 갈 수 없었다. 20시간 일하고 4시간 자야했다. 학업 포기. 3년여 고무공장. 밤낮 일을 하며 모은 돈 5000엔으로 벌목 사업. 그때 그는 스물둘의 청년이었다. 조규훈은 어느덧 하리마산업을 중심으로 10여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경제인으로 일본 경제계를 위협하고 있었다. 일본 경제계 거물이 견학을 올 정도였다니!

1948년 정부 수립 직후였다. 임차료가 없어 쩔쩔매던 도쿄의 주일 한국대표부에 당시 1300만엔의 거액을 내놓았고, 전쟁피해자 원호사업도 했다. 이후, 사업의 실패와 좌절이 있었다. 노년의 그는 학교 문전을 배회하고 있었고, 오고가는 교사들과 아이들에게 학교의 안녕을 묻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잊고 있었다. 

지난 개천절, 맑은 가을. 그의 고향 신촌리 작은 남생이못에서는 의미 있는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신촌 조규훈 선생 현창비 제막식. 일본에서 온 그의 아들 명현씨가 인사를 했다. "아버지는 다시 돌아와 고향에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하셨는데 끝내 올 수 없었습니다" 사회에 모든 것을 헌납했으나 어머니의 옷 한벌에 인색했던 아버지였다. 건국학교는 이제 유치원부터 초중고를 포함한 학교로 쑥쑥 성장하고 있다. 그토록 다시 돌아오고 싶었던 고향 땅. 한 번도 밟지 못했던 그는 결국 그의 이름자와 흑백 사진이 새겨진 현창비로 귀향했다.

현창비는 신촌 조규훈선생 현창사업회와 신촌리민들의 정성으로 세워졌다. 현창사업회 이정림 회장은 어려울 때 늘 자금을 댔던 이가 잊혀져 가는 것이 안타까웠다고 했다. 어린 시절 고향 신촌 바다 위로 동동 떠오른 나뭇조각들을 붙잡고 헤엄쳤다던 이회장. 그는 그것들이 조규훈 선생이 조천중학교를 짓기 위해 보낸 목재들이였음을 늦게야 알았단다. 그는 '음수사원 굴정지인'(목마른 자가 물을 마시면 그 근본인 우물을 판 사람의 은덕을 잊어서는 안 된다)을 떠올리며 그의 이름자 앞에 고향의 이름 '신촌'이란 호를 헌사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조규훈 선생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한 것은 2011년의 일이다.

현창비 제막식에 앞서 지난 2일 제주대 재일제주인센터에서는 조규훈선생의 정신을 기리며 재일 민족교육을 조명하는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이달 말까지 민족교육의 역사를 담은 전시회도 제주대 문화교류관에서 열고 있다. 한번쯤 찾아볼 일이다.

우리는 몰라도 너무 몰랐다. 아니 외면한 것은 아니었을까. 재일동포 민족교육은 식민지 시기의 산물이었던 우리의 역사다. 지금 재정난을 겪고 있는 민족학교들에 우리의 관심은 멀다. 재외한국학교 지원법은 아직도 제자리걸음이다. 제주도의 교육 사업은 재일 1세대로부터 가장 많은 수혜를 받았던 항목이다. 근데도, 우리는 그들에 어떠한 교육적 네트워크를 하고 있는가. 이젠 능동적으로 우리가 행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민족교육의 선구자, 다시 조규훈선생을 생각한다. 가팔랐던 시대를 살다 간 그의 혼은 아마 남생이못 어디쯤에 와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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