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원 제주대학교 사학과 교수·논설위원
중국의 서주(西周)시기에는 아직 이와 같은 도덕적 사실의 완전한 관념체계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信)'이 윤리개념의 범주로 성립하게 된 것은 춘추시기로 보여진다. 당시의 문헌 중에 '신(信)'이라는 글자가 종종 출현하는 것은 이 시기 '신(信)'이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춘추시대 '신(信)'은 윤리도덕관으로서 시대를 초월하는 불후(不朽)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시대의 변화로 인해 그 가치를 상실하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이것은 선진유가(先秦儒家)로부터 계승된 것이 가장 많았던 이유로 유가학설의 중요한 사상체계로 자리하게 되었다.
유가(儒家)의 입장에서 보면 도덕윤리와 사회정치 사이에는 구별이 없었다. 개인은 윤리도덕의 수양을 통해 몸소 효(孝)·제(悌)·충(忠)·신(信)·예(禮)·의(義) 등과 같은 윤리도덕규범을 실천했고 이것이 바로 정치활동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는 관료로 종사하며 정치에 종사하는 길을 굳이 거칠 필요가 없었기에 성인(聖人)이 능히 천하에 왕의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이 숭고한 도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법가(法家)가 강조한 것은 이법행언(以法行言)과 신상필벌(信賞必罰)로 국가의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반드시 백성들로부터 믿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 또한 일찍이 "사람은 모두 죽게 되어 있으되 신의가 없으면 즉, 백성이 정부를 신뢰하지 않으면 설 수가 없다"고 말한바 있다. 한비자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작은 신의가 성취되면 큰 신의가 확립된다. 그러므로 밝은 군주는 신의를 지키어 쌓는다. 상벌을 행함에 신의가 없으면 금지나 명령이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 "법에 신뢰가 없다면 군주의 앞길이 위태로울 것이며, 형벌이 준엄하게 단행되지 않으면 악을 누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즉, 법가는 신(信)의 관념을 통치의 도구로 간주한 것이고 더욱이 통치자가 이러한 부분을 장악하려면 자신의 위세를 세움으로써 백성을 통솔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信)의 관념이 윤리도덕의 관념으로 자리하게 된 것은 시공(時空)의 변천과 변화에 따른 것은 아닐 것이다. 순식간에 많은 변화를 일으키는 정치에서 운용되면서 여전히 그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저명한 역사가인 사마광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무릇 신(信)이라고 하는 것은 임금이 갖춰야 할 커다란 보배입니다. 나라는 백성에게서 보위되며 백성은 믿음에서 보위되니, 믿음이 아니면 백성들을 부릴 수 없고, 백성이 아니면 나라를 지킬 수 없습니다. 때문에 제왕된 사람은 세상을 속이지 않았고 패권을 가진 사람도 이웃을 속이지 않았으니, 나라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백성을 속이지 않았고 집안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그 친한 사람을 속이지 않았습니다. 잘하지 못한 사람은 이에 반대되었으니 이웃나라를 속이고, 그 백성들을 속였으며, 심한 사람은 그 형제를 속이고 그 부자를 속였습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믿지 못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면, 서로 마음이 흩어져 실패하기에 이릅니다. 어지러운 시대의 군주들은 싸우고 공격하는 시대에 살면서 천하가 속이는 힘을 좇고 있는데도 오히려 감히 믿음을 잊지 않고 백성들을 길렀는데, 하물며 사해를 고르게 잘 다스리는 정치를 하려는 사람에게 있어서야!"
내년에 있을 지방선거를 앞두고 우리 제주를 이끌어나갈 막중한 책임을 지닌 도지사 후보로 여러 인물들이 자천타천 거론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신의(信義)를 지켜온 인물인가에 대해 제주도민들은 냉철하게 판단해야 할 것이다.
이는 그들이 걸어온 길, 즉 그들의 역사적 행보를 살펴보면 손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