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순환 ㈜러브레터 대표이사, 논설위원

   
 
     
 
060-700-1119.

이 번호를 누르면 다음과 같은 음성 안내가 나옵니다. "대한적십자사가 운영하는 필리핀 태풍 성금 모금번호입니다. 삐 소리가 나면 2000원이 결재됩니다. 원하지 않으시면 전화를 끊으세요" 전화를 끊지 않고 있으면, 잠시 뒤 삐 소리가 들립니다. 이로써 담배 값도 되지 않는 2000원의 작은 돈이지만 그 짧은 몇 초의 순간에 필리핀 레이테 섬 타클로반 사람들에게로 2000원이 갑니다.

사는 게 바쁘다보니, 사상 최대의 태풍 하이옌이 강타한 타클로반의 참상을 제대로 접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국방송(KBS) '세계는 지금'에서 전하는 타클로반 리포트를 보게 됐습니다. 하늘에서 촬영된 타클로반의 풍경은 무슨 건설현장 쓰레기 더미 같은 느낌을 줄 정도로 어수라장이었습니다.

그리고 타클로반 인근의 풍경은 성한 데라곤 거의 없는 만신창이 육신 같았습니다. 망가진 가옥과 도로가 광폭한 자연재해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지만, 정작 보이지 않는 곳, 가족을 잃은 이들의 마음속이야말로 이번 재난의 '그라운드 제로'일 것입니다.

파괴된 도시의 한 구석에서 바람을 맞고 있던 한 어머니는 죽은 아들의 시신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며 가슴을 찢었습니다. 어버이가 자식을 잃은 슬픔을 '참척'이라고 하는데, 그 '참척'에 더해, 시신도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그 어머니는 어찌 감당해내고 있을지,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도로 곳곳에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어린이들의 시신이 나뒹굴고 있었고 그런 시신을 보던 젊은 여인은 자신도 엄마이기 때문에 가슴이 미어진다며 눈물을 쏟았습니다.

또한 이재민 대피소라는 곳은 말이 대피소지, 벽과 지붕만 있고 앞쪽에 문도 달려 있지 않은 창고 같은 곳이었고  바닥에는 물이 흥건했습니다. 대피소 나무 판대기 위에서 한 어린이가 몸을 웅크린 채 지친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절망의 땅, 상실의 시간들이 제 눈앞에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20분도 채 되지 않은 그 리포트를 보는 동안, 저는 고향 친구가 가져다준 '꼬다마'(알이 작은 감귤)를 까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따뜻한 거실에 앉아서 귤을 까먹으며, 지옥도를 보고 있는 내가 좀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이질감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방송 화면 오른쪽 상단에 박혀 있던 번호(060-700-1119)로 전화를 걸게 되었습니다.

제가 할애한 시간은 단 몇 초였고, 제가 낸 돈은 성금이라고 하기에도 창피한 2000원에 불과하지만, 그 리포트를 보면서, 그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고백하자면, ARS 성금 전화번호를 누른 것은 난생 처음입니다. 저는 필리핀에 가본 적도 없고, 아는 필리핀 사람도 없지만, 그 리포트에서 눈물을 흘렸던 여인들이 마치 고향 누나, 동생 같았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께서도 단 몇 초의 시간을 내, 단돈 2000원이라도, 가여운 타클로반의 여인들에게 마음의 작은 조각이라도 전해줬으면 좋겠습니다.

타클로반의 여인들이 하루 빨리 고통과 슬픔에서 벗어나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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