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필 제주관광대 사회복지과 겸임교수, 논설위원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물어온 일곱 글자의 안부가 강렬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일각에서는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느라 여념 없지만 그보다 중요한 점은 '개인의 안녕'을 넘어 '사회적 안녕'을 묻는 화두가 던져졌다는 점이다.

'웰빙'의 시대가 있었다. 헬스장과 샐러드뷔페가 인기였고 유기농에 관심을 가지며 신체적 건강과 삶의 만족도를 우선시하는 삶이 대세였다. 꽤 살 만 했었다. 그러나 '웰빙'은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국제 금융위기로 인한 경기부진이 장기화되면서 완전고용의 시대는 가고 불안정노동의 시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정규직 노동자는 언제 구조조정을 당할지 모르고 비정규직 노동자는 여기서 평생 벗어나지 못할까, 자신의 처지가 자식들에게 대물림될까 걱정이다. 한 번 떨어지면 타고 올라갈 사다리가 보이지 않는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이 자리 잡은 사회에서 탈락되지 않으려는 질주는 트라우마를 동반한 삶으로 연결된다.

아프고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위안이 필요하다는 공감이 '힐링'코드로 등장했다. 하나의 해결책으로 자리매김 하는 듯 했다. '힐링'을 앞세운 각종 프로그램과 상품이 쏟아져 나왔고 사람들에게 안도와 위안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힐링은 개인의 통증을 잠시 마취 시킬 수는 있었으나 모순된 사회구조로 인한 고통을 완전하게 잠재울 수는 없었다. 한 대학생이 묻기 시작한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물음에 '안녕하지 못 합니다'라는 응답이 봇물처럼 쏟아지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이 이를 방증한다.

'저는 다만 묻고 싶습니다. 안녕하시냐고요. 별 탈 없이 살고 계시냐고요. 남의 일이라 외면해도 문제없으신가… 그래서 마지막으로 묻고 싶습니다.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

평범한 인사말, '안녕'이 대한민국을 휘덮고 있다. '이 시대가 만든 성공의 잣대를 따라 개인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안녕이냐'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각계각층이 '안녕하지 못한 공동체'를 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거센 불길처럼 번지는 '안녕'에서조차 '소외'되는 사람들이 있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아이들과 목숨을 끊는 엄마,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맞고 죽어간 아이, 엄동설한에 폐지를 주어야 저녁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홀몸 노인들의 안부를 묻는 '안녕'의 목소리는 그 어디에도 들리지 않는다. 내가 아니어서 안도하고 나에게 다가올 미래는 다를 것이라고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들과 같은 소외계층은 빈곤과 사회적 단절, 이로 인한 고독과 무력감으로 인해 스스로 자신의 '안녕'을 챙기지 못한다. 머리띠를 동여매고 피켓을 들어 올려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철탑에 올라 저항의 몸짓을 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이웃과 사회가 이들의 '안녕'을 돌봐야 하는 이유다.

'안녕들 하십니까'로 시작한 '안녕'은 '안녕하지 못하다'고 확인되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은 '안녕한 세상 만들기' 차례다. 오늘도 삶의 벼랑 끝에서 절망하는 이들은 '메이데이, 메이데이'를 가슴으로 외치고 있다. 이제 이들의  마지막 구조신호에 응답해야 한다.

그 시작은 '사람'에 대한 관심이 출발선이다. 같은 시대에 한 하늘을 이고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어려운 상황이 생기면 서로 돕고, 좋은 일을 함께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더 나은 세상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먼저 보기 시작하면 할 수 있는 일들이 보일 것이다. '소외된 사람들의 안녕'을 먼저 묻자. "거기, 안녕하세요. 잘 지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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