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문화유산 제주잠녀] 6부 제주해녀 문화 목록 1. 물옷

▲ 제주 잠녀라는 이름으로 보편화된 고무옷은 1970년 이후 보급됐다.
2008년 물소중이·물적삼 등 도문화재 민속자료 10호 지정
'옷을 입고 작업'과 '작업복'간 기준 모호…시대상 반영해
무명에서 고무옷, 형광색 슈트로 변화 속 고단한 작업 여전
 
지난 2008년 제주특별자치도는 해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제주잠녀의 물옷과 물질도구 15점을 '제주도 문화재 민속자료 10호'로 지정했다.
 
물소중이, 물적삼, 물체, 수건 및 까부리 등 물옷(해녀복)과 태왁망사리, 족쉐눈, 세눈, 눈곽, 빗창, 종개호미, 호맹이, 작살, 성게채, 성게칼, 질구덕 등 물질 도구는 잠녀들의 삶과 밀접하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재질이나 형태 등이 조금씩 달라지면서 하나의 역사가 됐다.
 
# 70년 물질 인생 변천 과정 녹아나
 
▲ 물소중이를 입은 1960년대 잠녀들의 옛 모습
잠녀들의 기억은 크게 두 개로 나뉜다. '고무옷'을 입기 전과 입은 후다. 고무옷이 보급되면서 물질 작업에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바당'에서만 70년을 살았다는 한림읍 수원 이정현 할머니의 기억도 마찬가지다. 올해 구순의 이 할머니가 물질을 시작한 것이 15살 무렵, 1930년대 후반이다. 당시만 해도 잠녀들은 '속곳'차림으로 작업을 했다. '(물)소중이'는 1940년대 들면서 입기 시작했다. 미묘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 할머니의 설명대로라면 '속곳'은 말 그대로 '속옷'이고, 물소중이는 젖은 상태에서도 입고 벗기 편하게 어깨걸이를 단, 작업복의 시초라 할 수 있다. 
 
17세기 이건의 '제주풍토기' 「규창집」(1629)를 보면 '미역을 캐는 여자를 잠녀(潛女)라고 한다. 그들은 2월 이후부터 5월 이전에 이르기까지 바다에 들어가서 미역을 채취한다. 미역을 캐낼 때에는 벌거벗은 알몸으로 바다에 떠다니며…'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형상 목사의 '남환박물' 「속탐라록」에서도 '옷을 입지 않은 채로 작업하는데 부끄러움을 몰라 이것을 금지'했다는 기록이 있다.
 
무엇을 '물옷'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일단 '작업을 할 때 옷을 입은 것'으로 본다면 1702년 탐라순력도 '병담범주'에 그려진 용두암에서의 잠녀 물질 작업 현장이 기준이 된다. 이후 제주의 풍속을 기록한 문헌들에 '소중의(小中衣)' 등 잠녀들이 입고 작업하는 옷의 명칭이 언급된 것도 유의미하다.
 
▲ 위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물적삼, 까부리, 물수건, 물소중이.
물소중이 위에 입는 물적삼 역시 1930년대 이후 입기 시작했다. 이 할머니도 '17살 일본 물질을 갈 때 처음 속적삼을 입었다'는 기억을 꺼냈다. 당시만 해도 물수건에 '족은 눈'을 쓰고 하던 작업이 일본을 오가며 헝겊 모자인 까부리 형태로 바뀌었다. 고무옷보다 고무로 만든 모자가 먼저 도입됐다는 얘기도 했다.
 
잠녀 관련 기록들을 보면 까부리는 1960년대 일본이나 육지로 물질을 갔던 잠녀들을 통해 제주로 들어왔다. 이 할머니의 기억은 이렇게 제주 물옷사(史)가 된다.
 
# 고무옷 기준 변화속도 빨라져
 
이 할머니의 기억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물소중이를 입을 때만 해도 겨울에는 물질을 하지 않았다. 한번 작업에 15분을 넘기기 힘들었다. "그냥도 이가 닥닥 하는데…. 고되기도 하고 추워서도 못해" 음력 3~4월은 돼야 해경을 해 미역을 조물고 작업을 시작했다. 찬바람이 불면 여간해선 작업을 할 수 없었다. 잠녀들의 오래된 궤에서는 무명옷을 여러 겹 누벼 만든 물체 같은 겉옷이 종종 발견된다. 너나없이 배고팠던 시설에 무명으로라도 물옷을 만들 수 있을 정도면 '살 만 했다'. 밀가루 포대 등 기워만들 수 있는 것은 모두 동원됐고 검은색 물을 들이기도 했다. 물적삼이 일상화된 것도 1960년대 이후 일이다. 소매부리와 도련에 끈이나 고무줄을 넣어 몸에 맞게 조절했고 벌모작 단추로 앞을 여미게 하는 것으로 젖을 옷을 쉽게 벗을 수 있게 했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 고무옷이 보급되면서 시나브로 사라졌다. '작업'의 기준이 됐던 계절이며 시간 구분이 모호해졌다. 15분 남짓이던 작업시간이 한 시간에서 반나절로 늘어나고 '잠수병'도 생겼다.
 
이 할머니 역시 고무옷에 의지하면서 아이를 낳고 몸을 채 추스르기 전에 바다에 몸을 던졌고, 두 차례나 유산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하도리 고명순 잠녀(59)도 고무옷 얘기를 한참 늘어놓는다. 고 잠녀는 고무옷이 없을 때는 겨울에는 바다에 가지 않았지만 지금은 바람만 없으면 바다에 간다. 헛물질에 4~5시간은 기본이다. 작업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몸이 견뎌내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 1970년대 고무옷을 입었지만 고무모자 대신 까부리를 착용한 잠녀들. 사진=해녀박물관 조사보고서 '제주 해녀옷 이야기'
처음부터 모두가 '고무옷'을 입었던 것은 아니다. 바깥물질을 나간 잠녀들이 삯을 대신해 고무옷을 받았고 작업 능률이 높아지다 보니 하나 둘 입기 시작했다. 잠수회별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고무옷을 입으면 아예 작업을 하지 못하도록 막기도 하는 등 마찰이 심했다. 팔만, 모자만 하는 식으로 하나 둘 구색을 맞춘 것이 지금의 형태가 됐다. 특히 '고가'다 보니 선택이 쉽지만은 않았다. 1970년대 당시 한 벌에 20만원이 넘었다. 현재 가격도 물가 인상분과는 거리가 먼 27만원 안팎. 바다에 의지해 사는 잠녀들로써는 만만치 않은 가격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4개 시·군 체제이던 지난 1996년 남제주군이 가장 먼저 생활이 어려운 잠녀를 지원하기 위해 잠수복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후 다른 시·군들도 해녀의 복지 증진과 소득 증대를 이유로 잠수복을 지원했다. 이후 2003년부터 '수산업법 상 수산관련 종사자를 지원할 수 있다'는 어업인 지원 육성 규정을 근거로 전 잠녀에 대해 잠수복을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관련 예산이 한정되면서 모든 잠녀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지 못하면서 잠수회별로 자체 지원 규정을 만들어 가능한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도록 조치하고 있다. 잠녀수가 적은 곳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하도 등 잠녀가 많은 지역에서는 차례를 기다리는 데만 5~6년이 걸린다.
 
도내에 고무옷을 취급하는 매장도 하나둘 줄면서 악착같이 기워서 입고, 때워서 입는 것이 다반사다.
 
행여 바다 작업에서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길까 까만 색 일색이던 옷에 형광색을 가미한 유광 작업복도 만들어졌다.
 
그렇다고 고단한 물질이 조금이라도 편해졌을까. 사정은 그렇지도 않다. 작업 전 주먹만큼 쏟아 붓는 약의 양도, 병원을 찾는 횟수도 늘었다. 옷은 시절을 타는데 사람은 그러지 못한 까닭이다. 고 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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