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진상규명 활동 (4) 4·3 관련 단체

▲ 1991년 4월3일 제주시 신산공원에서 4·3유족회 주최로 열린 4·3위령제. '제1회 합동위령제'란 이름이 붙여졌다.
유족회 특별법 제정 견인
도민연대 첫 '상설조직'
범국민위 '전국화' 기여
 
어둠 속에 묻혀 있던 4·3의 진실을 규명하는 과정에 4·3 관련 단체들의 역할을 매우 컸다. 사실상 4·3진상규명 활동을 주도했고, 항상 그 중심에 서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단체가 제주 4·3희생자유족회(이하 4·3유족회).
 
4·3진실규명의 가장 기본이 됐던 4·3특별법 제정운동 과정에서 4·3유족회의 변화가 큰 변수가 됐다. 1988년 10월 제주도 4·3사건민간인희생자반공유족회로 출발한 4·3유족회가 기존 입장에서 선회해 4·3진상규명운동 세력으로 진입해 4·3특별법 제정운동에 동참한 결과, 중앙정부와 정치권을 압박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이다.
 
4·3반공유족회 출범 당시 시대상황은 여전히 공안정국 속에서 4·3이라는 단어조차 쓰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이로 인해 주로 무장유격대로부터 피해를 입은 희생자 유족들을 중심으로 유족회가 꾸려졌다.
 
하지만 1996년에 들어서면서 반공을 앞세워 4·3진상규명 무용론을 주장하던 4·3유족회가 점차 입장을 바꾸기 시작해 기존 대립각을 세웠던 4·3운동단체와도 협력과 연대을 하면서 4·3특별법 제정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1999년 3월 출범한 '제주4·3진상규명과명예회복을위한도민연대(이하 도민연대)'도 4·3특별법 제정에 한몫을 했다. 도민연대는 4·3문제 해결을 목적으로 한 상설조직으로, 중앙정부에 4·3문제 해결을 바라는 제주도민사회의 결집된 의지를 보여야 한다는 절박감에 탄생했다.
 
도민연대는 그동안 한시적인 위령사업과 행사를 추진해 온 '4월제공동준비위원회'와 '제50주년 4·3학술문화사업추진위원회'를 발전적으로 해소·통합하는 형식으로 결성됐다.
 
도민연대가 제주지역내 조직이라면 1997년 결성된 '제주4·3제50주년기념사업추진범국민위원회(이하 4·3범국민위)'는 전국 조직이었다. 출범 당시 4·3범국민위에는 종교, 학계, 법조, 문화예술 등 한국 진보진영 지도급 인사와 시민단체 대표들이 빠짐없이 포함됐다.
 
4·3범국민위는 4·3을 전국화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물론 4·3특별법 제정 등 진상규명 과정에서도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김영헌 기자

"4·3유족회의 역사가 곧 4·3진상규명운동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김두연 전 제주4·3희생자유족회장은 "4·3유족회가 처음 시작된 1988년에는 민간인 희생자는 4·3이라는 단어를 쓰기조차 어려워 군경 유족 등이 중심이 되는 반공희생자유족회로 출범했다"며 "당시에는 '반공'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야 하는 시대였고, 행방불명인 등 민간인희생자는 끼지조차 못했다"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은 이어 "하지만 반공유족회는 1990년 제주4·3사건민간인희생자유족회로 개칭됐고, 도내 곳곳에서 지회가 결성되면서 조직을 갖추고 1991년 4월3일 제1회 합동위령제를 봉행했다"며 "이후 2001년 4·3사건희생자유족회로 또다시 바뀌었다가 2007년 현재의 제주4·3희생자유족회가 됐다"고 설명했다.

또 김 전 회장은 "국가차원의 4·3진상보고서가 확정됐지만, 보수우익들의 헌법소원과 행정소송을 잇따라 제기하는 등 '4·3흔들기'가 본격화되면서 4·3유족회도 힘든 시기를 보냈다"며 "결과적으로 올해 첫 4·3희생자 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치러지면서 66년간 4·3유족들의 가슴에 맺힌 한을 어느정도 풀게 됐다"고 강조했다.

김 전 회장은 또 "역사는 물 흐르듯 가는 것이다. 4·3국가추념일 지정은 4·3역사의 큰 획을 그는 것"이라며 "지금까지 이념 대립과 갈등에서 벗어나 화해와 상생이라는 4·3정신을 바탕으로 도민화합은 물론 국민대통합을 이루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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