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성 논설실장 겸 서귀포지사장

4·3사건이 일어난지 66주년을 맞는 올해는 특히 4·3에 관한 관심이 뜨겁다. 오는 6·4지방선거에서 유력한 제주도지사 후보로 떠오르고 있는 원희룡 예비후보도 4·3의 한복판에 놓였다. 출마선언을 하자마자 각종 여론조사에서 현직 도지사마저 큰 차이로 압도하며 1위로 치고올라오는 등 파란을 일으키고 있는 그에게 첫 시험대가 다가왔다. 3선 국회의원 출신으로 12년의 임기동안 제주에서 열린 4·3추념일 행사에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은 데다 4·3위원회 폐지법안에 서명했던 사실로 인해 새정치연합 등 다른 후보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에 직면한 것이다.

추념행사 불참에 대해서는 쿨하게 사과하고 4·3위원회 폐지법안 서명의 경우 당시 당내 사정 등을 들어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고 해명한데 대해 도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또 그가 제주도지사 출마선언문을 통해 "강정마을은 특별한 아픔입니다. 강정주민과 도민의 손을 잡고 앞장서겠다는 제 진정성과 노력의지를 믿어주십시오"라고 밝히고 직접 마을을 방문하려 했지만 진정성에 의구심을 가진 주민들에 의해 거부당한 것도 아픈 부분이다. 서귀포시 중문동 출신으로 제주제일고 재학시절인 1982년 대입학력고사 전국 수석 및 서울대 수석 입학, 1992년 제34회 사법시험 수석 합격, 검사에 이어 한나라당 의원 시설 대권 주자 중 한 명으로까지 꼽히는 등 줄곧 중앙무대에서 활동하다 덜컥 도지사 후보로 차출된 그로서는 예상치 못한 암초를 만난 셈이다. 본격적으로 선거판이 열리기도 전에 제기된 이들 지적이 원 예비후보에게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지, 아니면 아킬레스건으로 두고두고 남을지 두고볼 일이다.

제주4·3이 올해처럼 두드러진 이슈로 등장한 것은 4월3일이 처음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면서 도민적 관심이 그만큼 높아진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4·3희생자 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기까지 4·3관련단체를 비롯한 온 도민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은 물론이다. 여기에는 제민일보의 역할도 빼놓을 수는 없다. 노태우정권 아래 공안당국의 서슬이 여전한 상황에서 1990년 6월 2일 창간호를 낸 제민일보의 4·3취재반은 1999년 8월까지 10년동안 456회에 걸쳐 '4·3은 말한다'를 연재, 40여년동안 금기시되던 4·3을 공론화의 장으로 이끌어내고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2000년 1월 공포) 및 국가기념일 지정의 밑거름을 제공하기도 했다.

반면 이 과정에 난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씨가 '4·3계엄령은 불법이었다'는 기사(1997년 4월1일자 1·3면)를 문제삼아 제민일보를 상대로 정정보도 및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주지방법원에 제기, 4·3과 관련한 첫 소송에 휘말린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법이 제정되기 이전에 계엄령을 선포한 것은 불법이며 불법 계엄령 밑에서 2만명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보도에 대해 제주지법 제2민사부는 2000년 7월20일 원고의 청구를 모두 기각, 제민일보의 손을 들어줬다. 이날 판결은 한 언론사 이해관계를 떠나 공권력에 의한 양민 학살을 사법부가 인정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남겼다. 또 그 뒤 광주고법 제주부를 거쳐 대법원에서 그대로 인용, 확정된 이날 판결을 내린 재판장이 현 제주지방법원장인 제주 출신 김창보 부장판사였던 점도 눈길을 끈다.

제66주년 4·3희생자 추모식이 내일 사상 처음 정부 주관으로 열린다. 후보 시절 제주를 찾아 "4·3사건은 우리 모두의 가슴 아픈 역사"라며 "제주도민의 아픔이 해소될 때까지 노력하겠다"던 박근혜 대통령의 약속이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단지 표를 의식한 헛 공약이었는지 도민들은 그의 참석 여부를 놓고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래저래 66주년 4·3희생자 추념식은 도민들의 기억에 길이 남을 행사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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