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마을의 유래를 찾아서] 4.안덕면

▲ 마을을 지키는 장군처럼 우뚝 서 있는 산방산이 어우러져 독특한 제주만의 풍광을 자랑하는 안덕면. 곶자왈 등 천혜의 자연경관과 더불어 전통 민속 문화 등을 보존하는데 지역 주민들이 앞장서고 있다.
화순·창천·대평 등 19개 자연마을 문화·역사 숨 쉬어
4·3 당시 초토화 등 아픔 딛고 전통민속 보존 앞장 서
 
깎아지는 기암절벽과 마을을 지키는 장군처럼 우뚝 서 있는 산방산이 어우러져 독특한 제주만의 풍광을 자랑하는 안덕면. 곶자왈 등 천혜의 자연경관과 더불어 전통 민속 문화 등을 보존하는 데 지역 주민들이 앞장서고 있다. 산방산을 중심으로 올망졸망 모인 안덕면 마을을 들여다보자.
 
1935년부터 '안덕면'으로 불려
 
안덕면은 12개 행정리와 11개 법정리, 19개 자연마을로 이뤄졌다.
 
1680년(조선 광해군 1)에 인구 관리를 위한 방리의 설정으로 대정현은 동면과 서면으로 나뉘었다. 지금의 안덕면은 대정현 동면에 속했었다.
 
1896년 동면은 좌면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13년 좌면에서 분리돼 중면이 신설됐다.
 
그 후 1935년 4월1일 중면은 다시 안덕면으로 개칭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화순리, 창천리, 대평리, 감산리, 상창리, 사계리, 덕수리, 서광리, 동광리, 광평리, 상천리 등 11개 법정마을은 화순리, 골물동, 창천리, 대평리, 감산리 동부락, 감산리 서부락, 상창리, 신남동, 대전동, 송죽동, 용해동, 덕수리 서부락, 덕수리 동부락, 서광서리, 서광동리, 동광리, 양잠단지, 광평리, 상천리 등 19개 자연마을로 나뉘었다.
 
신석기 이전부터 촌락 형성 추정
 
화순리의 옛 이름은 '밧내·벗내' 또는 '밧내왓·벗내왓' 그리고 '골물(곤물)'이다.
 
현재 화순리는 본동(화순리)과 골물동 등 2개 자연마을로 이뤄졌다. 본동은 상동과 중동, 하동, 가원동으로 나뉘고 골물동은 화순리 중심마을 북쪽에 있는 동네(웃동네)다.
 
벗내는 화순리 동쪽을 지나 바닷가로 흘러가는 내를 말하는 것이다. 이 내는 '감산내' 또는 현재 창고천과 안덕계곡으로 불리는 '창고내'라고도 한다.
 
서귀포시는 "지난 2011년부터 안덕면 화순리 일원을 종합 정비하는 '번내골권역 종합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히는 등 화순리 지역을 '번내'로 표기하고 있다.
 
행정이 화순리를 '번내'로 부르는 것은 '벗내'를 잘못 표기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계리는 산방산 남서쪽 해안 일대에 형성된 마을로, 산방산이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옛날 한 포수가 한라산에 사냥을 나갔다가 잘못해서 산신의 엉덩이를 활로 쏘게 됐다.
 
화가 난 산신이 손에 잡히는 대로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던진 것이 날아와 산방산이 됐다는 전설이 있다.
 
'산방'은 산 중턱에 위치한 '산의 방' 즉 굴에서 지명이 유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사계리에는 500여년 전 '자은골(장은골)' 일대에 김해 김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커졌다고 한다.
 
하지만 사계리 일대에 분포하는 사람 발자국 화석 등을 고려할 때 신석기 시대와 초기 철기시대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학계 등은 추정하고 있다.
 
사례리의 자연마을은 대전동, 송죽동, 용해동 등 3개 마을이다.
 
대전동은 큰밧(밭)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된 것을 한자로 바꾸어 표기한 이름이고, 송죽동은 활 쏘는 훈련을 했던 밭인 '솔대왓'이 있었던 데서 유래한 동네 이름이다. 용해동은 용머리 가까이에 있는 바닷가 마을이란 의미다.
 
춤추는 어린이 닮은 지형
 
옛 이름이 '쇄당·새당'인 덕수리는 '동동(동동네)'와 '도이지동(도리못골)' 등으로 나뉜다.
 
동동네는 본동네 동쪽에 있다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큰동네'라고도 하고, 도리못골은 도리못 주변에 형성된 마을이란 의미다.
 
현재 덕수리 자연마을은 동부락과 서부락 등 2개 마을이 있다. 마을 주민들은 동동과 서동, 도이연동 등으로 나눠 부른다.
 
서광리와 동광리의 옛 이름은 '자단이·자단리' 또는 '광청이·광쳉이'다.
 
서광리는 '넙게오름(광해악)' 동쪽과 서쪽에 있는 중산간 마을이고, 동광리는 '거린오름(북오름)' 북동쪽에 있는 중산간 마을이다.
 
삼별초가 제주도로 들어와 항파두리에 외토성, 내석성을 쌓고 궁궐과 관아를 건축하면서 주민들을 대거 동원시켜 강제 노역을 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고씨, 김씨, 양씨가 탈출해 자단리에 숨어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때부터 서광동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지역 주민 등은 알고 있다.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촌락이 형성되고 인근 지역인 서광리, 동광리, 덕수리, 사계리로 확산돼 자단리가 됐고, 자단리에 가장 가까운 촌락이 서광동리다.
 
동광리는 170여년 전 풍수사가 머물면서 "이 일대의 지형지세가 춤을 추는 어린아이를 닮았다"고 말한 데서 '무동이왓' 또는 '무동동'이라고 불린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 동광리는 4·3 사건으로 마을이 완전히 불에 타면서 주민들이 해변 마을로 이주해 한때 폐허가 됐었다.
 
이후 1953년부터 정부의 재건정책 등으로 무동동과 마전동 등에 사람이 모여 살기 시작했지만, 4·3사건으로 조수궤와 삼밧구석, 무동이왓은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 안덕계곡(왼쪽)과 대평리 해안가 위치한 박수기정.
넓은 들 '대평'
 
난드르는 대평리의 옛 이름으로, '마을에서 나간 들'리라는 뜻이라고도 하고 '큰 드르'의 뜻이라고도 한다. 넓은 들, 큰 들이란 의미로 '대평(大坪)'으로 표기했다.
 
대평리는 '열리'라고 해 '예래리'에 속했지만 조선조 때 외국 배가 자주 드나들어 뒤치다꺼리가 귀찮다는 이유 등으로 '창천리 2구'로 분리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평리 주민들은 광활한 벌판에 자리 잡은 곳이라 해 '큰드르' 또는 '난드르'라 불렀고, 대평리는 넓은 들이란 의미의 한자표기다.
 
대평리 마을 포구 일대는 '당캐'라고 했다.
 
옛날 대평리 마을 포구를 통해 중국 당과 원에 말과 소를 상납하는 세공선과 교역선이 왕래했다는 데서 유래된 것이 당캐로 알려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송항' 또는 '송포'라고도 불렸는데 주변에 큰 소나무가 있어 그렇게 불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평리 해안가에는 130m에 이르는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다.
 
이 절벽을 '박수기정'이라고 부른다.
 
박수기정은 '박수'와 벼랑이나 절벽을 일컫는 제주어인 '기정'의 합성어로, 바가지로 마실 샘물(박수)이 솟는 절벽(기정)이란 의미다.
 
박수기정은 '대왓기정'으로도 불린다. 절벽 중턱에 대나무가 무성하게 숲을 이루고 있는데 이를 두고 붙여진 지명이란 게 마을 주민들의 설명이다.
윤주형 기자 21jemin@je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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