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태림 수필가, 논설위원

요즘엔 막내의 첫째 딸인 여섯 살 된 손녀를 돌보는 중이다. 유치원의 퇴원 시간이 오후 세 시여서 그 시간에 맞춰 정확하게 데리러 가야 한다. 명단에 퇴원 시간을 적고 서명을 한 다음에 아이를 데리고 나온다. 부모가 맞벌이 부부인지라, 오후 세 시부터 애 엄마가 퇴근하는 시간까지 두어 시간 동안 내가 맡아 놀아준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첫째와 둘째 두 아이가 한 어린이집에 다녀서 아이들의 등·하교에 큰 불편이 없었지만 올해는 큰애가 따로 유치원에 입학하게 돼 첫째는 유치원으로, 둘째는 어린이집으로 서로 나눠 다니게 되고 등·하교 시간도 제각각이어서 직장인으로서는 혼자 담당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요즘 젊은 맞벌이 부부들이 아이 낳기를 저어하는 이유를 충분히 알만 하다. 나처럼 옆에서 조금이나마 도와주는 보조자가 없는 집은 육아 때문에 직장을 접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지난 3월, 첫째의 유치원 입학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공립유치원에는 배정 순위가 뒤로 밀려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여러 유치원에 입학원서를 접수시킨 후, 온 식구가 총출동해 추첨 장소에서 대기했으나, 두 군데나 낙방하고 겨우 입학한 것이다.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다. 손녀는 이제 막 한 자리 숫자 더하기를 배우는 중이다. 내가 적어 준 덧셈 문제를 푸는 아이의 모습이 진지하다. 귀엽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손가락셈이다. 왼손가락 세 개, 오른손가락 네 개를 펴서, 고개를 끄덕이며 센 다음 '칠'이라고 속삭이며 공책에 '7'을 적는다. 옆에서 바라보는 나의 표정을 살피고는 배시시 웃는다. 큰 숫자와 작은 숫자를 구분하는 부등호 표시도 정확하다. 한 쪽이 얼마나 많고 적음도 척척 알아낸다.

한글 학원을 다녀온 다음 날에는 숙제를 한다며 자그마한 다담상을 책상삼아 공책을 펼쳐놓는다. 숙제하는 폼이 어엿한 학생이다. 숙제를 끝내면 받아쓰기를 시켜본다. '고구마, 그네, 기차' 등등, 책에 나온 단어들은 줄줄 쓴다. '고기'라고 부르면 쓰기를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본다. 책에 없는 단어다. "고구마의 '고'와 기차의 '기'를 쓰면 되지" 하면 재빨리 알아들어서 그대로 써놓고 '고기'라고 잘 읽는다. "야, 또 백점이네" 하고 칭찬하면 자기가 '100'이라 쓰고 밑에 두 줄을 좍좍 긋는다. 두 팔을 활짝 벌리고 활개를 친다. 아이 어른 없이 백점은 뿌듯한 것이다. 텔레비전 자막에 나오는 글자들을 아는 대로 짚으면서 소리 내 읽는다. 지금은 글자를 익히는데 꽤나 재미가 붙은 모양이다. 이런 아이의 자세가 오래오래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나만의 바람이 아니라 모든 부모의 꿈일 것이다.

유독 손녀의 피부는 희고 곱다. 말 그대로 백옥이다. 거무튀튀하고 억세어 보이는 건강 체질하고는 반대다. 어쩐지 유리그릇처럼 위태로워 보이더니 '특발성' 어쩌고저쩌고 하는 긴 이름의 병 징후가 짙어 서울 큰 병원을 두 번이나 다녀왔다. 부모의 지극정성과 정확한 음식 수발로 완치에 이르렀으나, 지금도 먹을거리에는 매우 조심한다. 그저 아이의 환심을 사려고 여러 가지 맛난 과자를 사 줘도, 먹어야 될 것과 안 될 것을 제대로 가려낸다. 과자라면 가리지 않고 먹고 싶은 어린아이인데도 그 달콤한 유혹을 참아내는 어른스러움이 기특할 정도다.

아이들은 어른의 스승이라 했다. 인간 본연의 모습이다. 거짓도, 사악함도, 음모도, 허세도, 과장도 없다. 그저 순수한 오욕칠정(五慾七情)의 발로다. 우는 아이를 욕하거나, 보채는 아이를 탓하거나, 제 말대로 안 듣는다고 매를 드는 것은 모두 어른의 잣대다. 서지 말고 앉아서 아이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춰볼 필요가 있다.

이순(耳順)의 막바지에 들어서서 세상을 꽤 알았다고 믿었던 모든 것이 내 손녀의 거울에는 어떻게 비쳐졌을까. 순수한 자연색 모습일까, 아니면 잡색으로 덧칠된 추상화일까.

요즘은 손녀를 돌보면서 수업료 없이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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