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익 수필가

간밤에 비바람이 지나갔다. 문간에 낙엽이 나뒹굴고 종이 부스러기, 담배꽁초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그대로 들어가지를 못하겠다. 빗자루로 허접 쓰레기들을 쓰레받기에 담는 중인데 길바닥에 뭔가 찰싹 달라붙은 게 시야에 들어온다.

아스콘 길에 달라붙은 희끄무레한 이물. 아스콘과 대비되는 색이어서 확 눈에 띈다. 제거해야 한다. 쓸고 또 쓸어도 소용이 없다. 운동화를 신은 발로 비벼댔지만 꽉 엉켜 붙어 꿈쩍도 않는다.

씹다 만 껌이 길 아스콘에 엉켜들었다. 본질 아닌 게 본질을 가장해 주인 행세다. 갑과 을이 뒤바뀌어 혼돈의 세상이다. 세상만사 다 그렇고 그런 건데 길에 눌어붙은 껌딱지 하나 가지고 웬 호들갑인가.

4월16일, 세월호 참사는 큰 슬픔이었다. 가슴에 무지개꿈을 품고 있던 고교생들이, 꽃송이들이 숱하게 지고 말았다. 사람들 모두 TV 앞에 앉아 이제나저제나 하며 구조 상황을 지켜봤다. '이 일을 어째' 한숨 몰아쉬며 어서 구조되기만을 학수고대했다. 모두의 염원이었지만 되돌아온 것은 허탈과 비탄의 강물뿐.

그새 영국과 그리스에서 대형 해양 사고가 잇따랐다.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인명피해는 일어나지 않았다. 구조작업의 신속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부러웠다. 재난 구조 매뉴얼이 제대로 작동했고 평소 훈련한 그대로 움직였다는 소식을 접해서다. 왜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걸까.

심히 부끄러웠다. 왜 이리도 다를까. 진도 앞바다, 빤히 바라보면서도 아까운 생명들을 놓치고 말다니,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째서 우리의 초라한 몰골이 자꾸만 떠오를까. 안전에 대한 고려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유착·매수·묵인·과적 등 관·상·민이 합작한 예정된 살인이라고 할 수밖에.

기본이 바로 서 있지 않았다. 우리는 그동안 허기진 배를 부둥켜안고 보릿고개를 넘다 보니 '빨리빨리' 문화가 껴들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그럭저럭 넘어온 세월이었다. 그새 몇 번에 걸쳐 안전 불감증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지만 설마하며 이를 외면하고 오로지 경제성장에만 매달려오다 끔찍한 참사를 맞은 것이다.

또한 사람을 적재적소에 심어놓지 못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외면당하고 있다. 학연·지연·혈연에 따라 인사가 이뤄져서 비본질인 껌딱지들이 산지사방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 그들이 인맥을 이루며 한통속으로 돌아가는 세상이다. 공무원들이 산하단체와 유착하는 먹이사슬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겉만 번지르르하지 속은 텅텅 빌 수밖에 없다. 이번 세월호 참사를 보며 도처에 껌딱지들이 자리 잡고 있음을 통감한다. 그런 그들에게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를 바랄 수 있을까.

나는 해양경찰하면 군대의 'UDT'처럼 훈련을 엄청 하는 것으로 여겨 왔다. 그런데 이게 무언가. 실제로 물속에 뛰어들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해양경찰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지 않는가. 승진에만 목맨 사무직으로 대부분 채워지고 있다니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던 것이다.

이런 시스템이 해양경찰 한 군데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공무원사회를 비롯해 정치계·경제계·법조계까지 전방위적이다. 아직도 전관예우라는 사슬이 시퍼렇게 살아 있으며 자리를 보전하기 위한 공방이 치열하단다. 인권을 빙자한 껌딱지들이 사회 밑바닥까지 파고들어 혼란을 가중하고 있다.

6·4 지방선거도 끝났다. 달라져야 한다.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환골탈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도래한 것이다. 또 다른 세월호가 고개 들지 못하도록 국가를 개조하는 일에 우리 모두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

국가 개조, 힘겨운 과제다. 연단에 올라선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생각한다. 다양한 연주자들을 모아 하나의 합주를 이끌어내듯 국가경영도 그렇게 조화를 이끌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 껌딱지들이 설치지 않는 세상을 그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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