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주 제주에코푸드 대표, 논설위원

제주 자연의 상징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다들 한라산과 오름이라고 대답한다. 이어서 민속적 상징을 물으면 돌하르방이 선두로 올라서고 해녀와 조랑말이 차례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제주 역사의 상징물은 무엇이냐'고 묻자 '혹시 관덕정이 아니냐'고 머뭇거린다. 제주는 지난 2006년 특별자치도로 법적지위를 부여받았다. 도정은 유네스코 유산등록 등 나름대로 상징을 찾기 위해 노력해 왔다. 허나 이렇다 할 역사적 상징물을 내세우지 못했다. 이러한 마당에 필자는 하원동 법화사지를 내놓고 싶다.

세계가 팍스 몽골리카 체제로 편입되던 13세기 말엽 탐라는 특별자치도의 지위를 누렸다. 탐라의 성주 양호(梁浩)가 1267년 1월 북경에서 쿠빌라이칸(1215~1294)을 만났다. 그는 탐라 성주에게 비단옷을 입혀주며 '탐라도(耽羅都)'가 중심이 된 대해양제국의 꿈을 내비쳤다. 대칸은 먼저 제주를 고려에서 분봉시켜 '탐라'로 환원시킨다. 「원사」에 고려 밑에 일본 보다 위에 탐라전을 기록했다. 그 만큼 제국의 경영에 탐라가 절실했다는 이야기다.

이때부터 탐라의 위상은 크게 달라졌다. 우리는 몽골제국이 경영했던 다른 지역처럼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다문화 사회를 통한 공존·공영의 시각에서 봐야한다. 그동안 몽골의 목호에 의한 지배와 삶을 수탈과 핍박으로만 인식해 왔다. 도내 유적지 곳곳에서 삼별초와 최영은 탐라영웅이다. 반면 목호들은 광폭한 집단으로 매도되고 있다.

당시 목호를 위시한 탐라주민 사회는 철저히 다문화 사회였다. 고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대원제국으로부터 자치권을 부여받고 있었다. 역사상 당시처럼 자치권을 경험한 적이 있었던가. 이러한 시각에서 접근하면 자치권을 상징하는 역사적 기념비는 어디인가. 바로 법화사가 눈 안으로 들어온다.

지난 1990년대 법화시지 발굴과정에서 명문기와가 수습됐다. 삼별초가 입도하기 전에 중창을 시작해 10년 후 마쳤다는 기록이다. 비로소 법화사의 실체가 쿠빌라이칸과 관계가 있음이 드러나게 된 셈이다. 나아가 탐라총관부와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 태종 8년(1408년)까지만 해도 법화사 노비가 무려 280여명에 달할 정도였다. 그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원제국의 네트워크인 법화사는 정치·경제·문화·산업의 세계적 발신지였었음을 알게 한다. 

그런 법화사가 원과 명의 교체와 함께 운명을 다하고 말았다. 구체적으로는 1406년 4월 법화사 아미타삼존불상이 명의 영락제 손으로 넘어간 일이다. 탐라와 원제국을 묶는 불상의 강제적 이동은 몽골세력의 소멸을 상징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주지하듯이 토착인과 피를 나눈 목호의 수는 대단히 많았다. 결속관계도 역시 강했다. 전형적인 다문화 집단의 막강 파워가 분출된 것이다. 그 힘은 도통사 최영의 무력진압에서 나타났다. 고려는 정예군 2만5600명을 동원했다. 당시 목호군은 4000여명 정도였다. 이 원정은 25일 동안 주야로 벌어진 총력전이었다. 무기가 바다를 뒤 덮고 간과 뇌가 땅을 가렸다는 전승기록에서 보듯 그들 상당수는 사망했다. 그때 도민은 2~3만명이었음을 상기하면 다문화 가정의 젊은이는 목호와 연관돼 있었다. 이렇듯 법화사지 중심으로 139년 동안 꽃피웠던 자치권은 종말을 고했다. 끝내 젊은이가 없는 조선의 제주는 변방으로 전락했고 법화사는 육지에서 온 관리들에 의해 훼멸되고 말았다.

자신의 역사와 문화의 정체성에 대해 답할 수 있는 지역만이 특별자치권을 향유할 수 있고 자긍심이 살아나는 법이다. 제주의 상징은 암울했던 조선시대의 관덕정이 될 수 없다. 다문화 탐라민족이 이룩한 세계 속의 법화사지가 살아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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