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석 문화예술재단 이사장

오랜 만에 탑동에 나왔다. 이 곳을 거닐 때마다 느끼는 것은 어릴 때 한적했던 마을의 흔적은 찾을 길 없다는 점이다. 한 호텔 앞 모퉁이에 남아있는 초가집이 실루엣처럼 과거로의 여정을 이끈다.

반세기 전에 비해 우리 사회는 많이 변했다. 사람보다는 말(馬)이 살기에 더 어울리는 곳, 정치범을 가두어 놓기에 알맞은 유배지 정도로 알려졌던 변방의 섬에 1000만이 넘는 관광객이 찾고 한국사회 중에서 가장 동적인 지역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그 발전의 이면에 다른 도시에서 경험하고 있는 빈부의 문제, 교통문제, 청소년문제, 환경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제주사회의 발전에 따른 비인간화·인간소외·자연생태계의 파괴 등과 같은 중병을 앓기 시작했다는 반증인 셈이다.

여기서 제주도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의 문제보다 그 발전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더 많은 반성을 해야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제주사회를 추진시킨 진보에 대한 검토이다. 우리 사회는 인구 면에서, 생활 수준 면에서 과거 반세기보다 눈부시게 발전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발전의 척도가 얼마나 옳은 것인가 하는 점이다. 물론 지역의 발전과 관련해서 개발이냐 보존이냐를 쉽게 결정할 수 없고, 그 결과가 축복으로 나타날지 혹은 재앙을 초래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는 없다.

한라산의 식생을 보호하고 오름의 훼손을 막는 것보다는 어쩌면 젊은이들에게 일자리 하나를 더 제공하고,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더 많은 기반시설을 확충하는 일이 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제주사회 곳곳에 경제발전과 과학기술문명이 함축한 심각한 의미를 숙고하지 않을 수 없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삶은 언제나 자신을 위협하는 것들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흔히 이야기하는 것처럼 제주인의 삶 역시 거친 파도를 헤치며, 화산회토를 일구면서 자연을 이겨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 보다 더 삶의 질이 개선되고 풍요로운 삶을 즐길 수 있게 된 바로 오늘날 제주사회가 환경오염, 자연의 황폐로 그 어느 때보다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위협을 받게 됐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이미 청정한 바다로만 믿고 있던 주변 어장이 황폐화된 것은 물론 각종 환경 오염원들이 확산됨을 확인할 수 있다.

1970~1980년대 장밋빛으로만 그려졌던 개발과 성장으로 서술돼 온 우리사회의 변화와 성취의 의미는 오늘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정반대의 의미를 갖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제주도가 추구하는 경제성장 자체가 하나의 지향해야 할 기획인지 아니면 문명의 리스크인지 불분명한 상태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1950~1960년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앞만 보고 고속주행 하던 발길을 멈추고 되돌아 볼  필요는 있다. 우리 시대에 중요한 문제는 진보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한 진보이고, 누구를 위한 진보인가'를 성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진보로 모든 것이 정당화되던 우리사회의 개발 논리가 이제 우리의 앞날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검토하면서 제주사회의 미래를 전망하는 갈피를 잡아갔으면 하는 생각이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