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최초의 국가성립에 관한 역사적 자료를 반드시 정사(正史)의 기록만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 대체로 정사라고 하는 기록들은 특정한 국가나 집단이 그들의 통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기록되고 해석되어 왔으므로 민감한 부분일수록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정사는 정사대로 신화나 우화, 민요, 또는 일기 및 그 밖의 구전무서(口傳巫書) 등도 검증을 거쳐 시공적으로 역사적 사실과 연관 있음이 확인될 때에는 훌륭한 사료로서의 가치가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래를 엮어 만든 중국의 시경(詩經)이나 일본의 만엽집(萬葉集) 등을 사료로 인용하는 예는 허다하다. 본고에서는 지금까지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잊혀진 무속자료에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한다.

제주도를 흔히 신들의 고향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두무악 해민들은 달을 보고 조수의 간만을 알고, 별자리를 보고 배의 방향을 잡았으며, 하늘과 바다와 구름을 보고 바람을 예측하였다. 그러나 항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위험이 따르므로 해민들은 다양한 신들을 섬겼으며, 신들의 총본산이 광양당(廣壤堂, 현 삼성혈)이었다.

1658년 당시 제주목사였던 이원진(李元鎭)이 편찬했다는 탐라지(耽羅志)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광양당을 가리켜 한라호국신사(漢拏護國神祠)라 이름하고 있다. 호국신사가 무엇인가? 고대국가에는 종교와 정치가 일원화되어 있어서 종교행사를 주관하는 자가 나라를 다스렸다. 제주도와 풍토가 비슷한 일본에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마쓰리고토(政事)라고 하는데 마쓰리는 본래 제례(祭禮)를 뜻한다. 호국신사라 함은 이와 같이 종교와 정치의 일원적인 장(場)을 말하는 것이다.

1702년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이 조선조의 숭유정책(崇儒政策)의 일환으로 도내의 음사(淫詞), 절간 등 130여 개소를 불태워 없애고 광양당을 폐지하여(탐라기년) 그 자리에 유교의 예식에 따라 제례를 행하도록 제도를 바꾸어 버렸는데,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까지만 해도 광양당의 원형은 상당부분 보존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유교의 혹독한 음사탄압에도 불구하고 광양당 신관의 대사(臺詞)는 유인들의 관심 밖 사각지대에서 비밀리에 전승되어 누군가에 의하여 이두문(吏讀文)으로 기록되고, 이것이 다시 제주인 문창헌(文彰憲)이라는 사람에 의하여 풍속무음(風俗巫音)이라는 이름으로 필사 편집되어 오늘에 이른다. 한편 제주대학교 현용준(玄容駿)은 무당들의 사설(辭說)을 수집, 편집하여 「제주도 민속자료사전」을 만들어 수록하고 있다.

영주지의 초기기록이 사서(史書)의 일반적인 신화형식을 취하여 추상적인데 반하여 무속자료는 대담하고 직설적이며, 구체적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비밀속에 가려졌던 초기 국가 형성 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영주지가 못다 쓴 건국 과정을 여과없이 노래하고 있다.<고용희·제주시 노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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