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휴 전 초등학교 교장·논설위원

7월이다. 방학이 다가오고 있다. 나는 요즘도 방학 때가 되면 우리 아이들이 자라던 때를 생각하며 미안해진다. "아빠, 이번 방학에도 어디 안 갈 거?" 용기를 낸 한 녀석이 쭈뼛거리며 말을 꺼냈다. "뻔한 말을 무사 허염디? 가라 봤자 풀 안 살 말인디" 옆에서 아내가 말을 자른다. 나는 얼굴이 벌게지면서 아무 대답도 못했다. 읽던 책에다 코를 박았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아비노릇을 제대로 해준 적이 없는 '꼴통 샌님'이었다. 학교 일에 '열심'한답시고 모든 것을 아내에게 맡겨버린 채 모른 체했던 나였으니까. 올망졸망 자라는 다섯 오누이를 먹이고 입히고 키운 것은 불쌍한 아내의 몫이었다. 어쩌면 나는 아내를 슈퍼우먼이라고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는 왜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 한 번을 함께 다녀오질 못했을까. 아이들이 한창 꿈을 찾아 헤맬 때, 아이들이 가보고 싶다는 몇 군데를 데리고 가서 구경도 시키고 사람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을 잠시만이라도 보여주었더라면 아이들의 가슴에 작은 꿈이 싹틀 수도 있었을 텐데…. 외국여행이나 값비싼 호텔숙박체험이야 어렵더라도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돌아보고 몇 군데 시장 같은 델 찾아가서 그 생생한 현장을 느껴보게 해 주었더라면 아이들 가슴속에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싹텄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정 그럴 여유가 없었다면 동트는 새벽, 태양과 함께 붉게 물들어가는 바다를 바라보며 말없이 손을 잡아주기만 했어도 우리 아이들은, 그 작은 가슴 떨리는 순간을 누릴 수 있었을 텐데. 
 
일 년에 단 몇 번만이라도 오름 오르고 숲길 걷는 일을 함께 했더라면 우리 아이들의 가슴이 좀 더 싱그러운 향기로 채워질 수도 있었을 텐데. 아이들 손을 잡고 책방을 찾아가, 가난한 어린 시절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꿈을 이루어낸 노력형 인물의 전기쯤은 몇 권 사줄 수 있었을 텐데.
 
아이들은 그런 대로 공부를 꽤 했고, 생각하는 것도 꽉 막힌 놈은 없었던 것 같다. 조금만 뒷바라지를 잘해주었더라면 그들 가슴속에 더 좋은 꿈을 키우게 할 수도 있었으련만, 나는 노동집약형시대의 사고를 벗어나질 못했다. '지들이 다 알아서 크겠지….' 이런 생각이었기에 아이들에게 관심을 쏟지 못했다.
 
정년퇴직을 한 뒤에야 비로소 내 눈에 아이들이 들어왔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아이들은 어찌어찌 저 스스로를 추스르면서, 때로는 힘에 부치는 일은 서로 챙겨주면서 학교를 나오고 나름대로의 길을 가고 있다. 고마운 일이다. 아이들이 고맙고 아내가 고맙다. 아이들과 아내에게 미안한 내가 아직도 엉거주춤, 미안한 마음의 짐을 내려놓지는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늦었지만, 다섯 남매의 아버지로서 할 일을 제대로 해내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내 꿈이 뭔지 모르겠어요"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진로상담코너에는 청소년들이 자신의 진로를 어떻게 정할지를 모르겠다는 호소가 3만4000건이 넘는다는 보도가 있었다.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찾지 못해서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봐야 한다.
 
아이들의 꿈은 '무(無)'에서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부를 잘한다고 꿈이 야무진 것도 아니다. 재주가 있다고 장래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뭔가 가슴을 치고 울리는 공명, 감동 같은 것을 경험할 때에 아이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꿈을 만들어가게 된다. 마치 진주조개의 살 속에 진주의 '씨'가 맺혀 있어야 진주가 생기고 자라듯 여행에서 보고 들으면서 꿈을 다질 수도 있다. 가령 남아프리카를 여행하다가 백인에게 박해 받는 인도인을 보고 가난한 인도인을 위한 인권변호사가 되겠다고 결심을 한 간디처럼.
 
방학이 다가온다. 무덥고 짜증나는 여름이라고만 여기지 말고, 우리 아이들에게 꿈을 찾아줄 기회라고 생각해본다면 어떨까. 내 아이들과 함께 여행 한 번 다녀오지 못한 못난 아비가 뒤늦게나마 이 말 한마디는 꼭 전하고 싶다.
 
"얘들아, 이 아빠가 미안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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