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원 제주대학교 사학과 교수·논설위원

중국 한(漢)나라 선제(宣帝) 본시(本始) 2년(기원전 72년)에 있었던 일이다. 그해 봄, 대사농(大司農)의 자리에 있었던 전연년(田延年)이 죄를 짓고서 자살했다. 이유는 이러했다. 원래 소제(昭帝)의 상사(喪事) 때에 민간인들의 수레를 빌려 썼는데 전연년은 그 임대료를 속이고 부풀려 3000만 전(錢)을 도적질해 가졌다. 그런데 그에게 원한을 가진 집안에서 고발을 했던 것이다. 
 
한무제(漢武帝)가 세상을 떠난 후 소제 유불릉이 즉위했는데 나이가 겨우 여덟 살이었다. 그래서 조정 대사는 모두 곽광이 결정했다. 기원전 74년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소제가 21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소제는 아들이 없었다. 곽광을 비롯한 대신들과 황후가 논의한 끝에 무제의 손자인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황제로 세우기로 했다. 그러나 유하는 경성으로 올라오는 길에서부터 음탕한 행동을 했고 황위에 오른 다음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이 음탕한 생활을 했다. 그것을 본 곽광은 애가 탔고 대사농 전연년과 의논해 마침내 유하를 폐위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해 유하를 폐위시킨 다음 무제 유철의 증손자 유순(劉詢)을 황위에 올려놓았는데 그가 바로 선제였다.
 
선제가 무릇 조정의 공무는 우선 대장군 곽광에게 청한 다음 황제에게 다시 청하라는 어명을 내릴 정도로 실권자였던 곽광장군에게 전연년은 대단히 중요한 정치적 동지였다. 그러한 이유였을까. 곽광은 전연년을 불러 물으면서 그 죄를 벗어날 길을 만들어 주려고 했다.
 
그런데 전연년이 저항하면서 이르기를 "그러한 일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했다. 곽광이 이르기를 "그러한 일이 정말 없다면 마땅히 끝까지 추궁해야지"라고 했다. 
 
어사대부(御史大夫)인 전광명(田廣明)이 태복(太僕)인 두연년(杜延年)에게 이르기를 "춘추(春秋)의 대의를 보면, 세운 공로를 가지고 저지른 과실을 덮어둔다고 했으니 창읍왕을 폐위시킬 때에 전연년의 말이 아니었더라면 그 큰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관부(官府)에서 3000만전을 내어서 스스로 그것을 갚게 하면 어떠할까요? 원컨대 이 어리석은 사람의 말을 대장군에게 이야기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두연년은 이 사실을 대장군(大將軍)에게 이야기했다. 대장군이 이르기를 "정말로 그렇소. 그는 진실로 용사(勇士)입니다. 그 커다란 의논을 할 때에 조정을 진동하게 했오"라고 했다. 그리고 곽광은 손을 들어서 그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이르기를 "나로 하여금 오늘에 이르러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전광명에게 미안하지만 대사농 전연년을 감옥에 보내서 공정하게 그 사건을 처리하게 하시오"라고 했다.
 
곽광은 처음에 전연년을 비호하려고 했으나 전연년이 솔직하게 자복(自服)을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처럼 처리한 것이다. 이리해 전광명이 사람을 시켜서 전연년에게 말했다. 
 
전연년이 이르기를 "다행하게도 조정에서 나에게 관용한다고 하더라도 무슨 면목으로 뇌옥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가리켜서 비웃게 할 것이며 졸도들도 나의 등 뒤에서 침을 뱉게 하겠습니까?"라고 하고는 바로 문을 닫고 혼자서 재사(齋舍)에 들어가서 웃옷을 벗고서 칼을 들고 배회했다. 며칠 후 사자가 전연년을  정위(廷尉)에게 데리고 가려고 왔고 그 사자가 도착했다는 북소리가 울리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장관후보자들의 청문회가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는 지금 위증을 일삼는 후보자들의 태도와 바로 그러한 자들을 추천하고 비호하고자 하는 자들은 모름지기 곽광과 전연년의 일화에서 느끼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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