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 시인·논설위원

일본 치바(千葉) 바다에 흐르는 노래. 바다에 무수한 별들이 쏟아지면 고향의 별들인가 했다. 거친 파도속에선 눈물 그렁하지 않은 날 없었다. 바다를 고향으로 품은 제주해녀(잠녀)에게 일본 아마가사키나 시즈오카나 다케오카나 그녀가 몸을 데인 바다는 그랬다. 
 
"스무살에 일본 나오란/ 남광 같이도 못 살아보곡/칠성판을 등에다 지고/바당물을 집밧(밭)삼아/갈매기를 벗을 삼고…/손을 꼽고 해를 세니 70년이 지나가고/고향 산천을 찾고 간보니 부모 형제 다 죽언 없고/들어나갈딀 생각해보니 어이가 없고 기가막혀/어머니 산을 찾고 간보니 개고장풀만 짓어있고/어머니 나오랏수다 허여도 오란디야도 아니허고/돌아서서 오젠 허니 눈물이 앞을 가려…바다에 와서 봐도 나 혼자만 있어라"
 
시인만 직관으로 노래를 하는가. 이 노래. 올해 아흔 하나. 노해녀. 한 인간의 격한 일생이 읊조리듯 부르는 그녀의 제줏말 자작곡 노래가락에 흐르고 있었다. 얼마전 일행과 조사차 만난 도쿄의 동쪽 태평양 연안 치바. 그 바다에서였다. 마침 치바현까지 태풍 너구리가 튼다던 그날. 하늘은 서서히 잿빛이었고, 파도는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파도마저 그녀의 절절한 노래에 몸을 비틀고 있었던가. 그랬다. 노해녀의 눈동자는 별처럼 빛났으나 눈물은 솜빡했다. 차마 그녀의 노래는 함축된 인생, 그 자체였고, 시였다. 해녀 홍석랑. 이 즉흥 노래의 달인은 자신의 가락에 가끔 가사만 바꿔부른다. 
 
비양도를 왔다갔다하며 서툰 물질을 했다. 홍석랑. 언니따라 고향 한경면 금능리를 떠나 오사카로 떠나는 군대환에 몸을 실었을 때는 스무 살. 돈벌러 떠난 출가물질이었으나 속은 일본의 군수산업에 동원된 징용물질이었다. 일제강점기 전쟁의 막바지, 일본은 해녀들까지 동원, 군수용 화학연료가 되는 칼륨이 풍부한 우뭇가사리, 감태같은 해초를 채취하게 했다. 이미 1939년 국민 징용령에 의한 '모집' 형식의 동원계획이 있었다. 그녀, 무명소중기입고 제주해녀들과 남의 나라 차가운 바다에서 수없이 해초를 캤다.
 
해방직전, 팡팡 공습하던 오사카에서 고향 남자 만나 혼례를 올렸고, 아이를 낳아 치바로 건너갔다. 전쟁이 끝났으나 그녀는 바다에 있었다. 함께 왔던 언니는 고향으로 갔으나 그녀는 거기 있었다. 행복할 수 없는 삶이 이어졌다. 첩첩 곡절 가장의 삶, 물론 고향으로 갔다면 4·3광풍에 희생된 언니처럼 순탄하지 않았을지 모를 일이지만. 
 
고향 아닌 바다는 고향이 됐고, 그녀의 거처는 바다였다. 문만 열면 출렁이는 바다, 매일밤 고향은 그녀의 마당 파도소리로 달려왔으리. "한락산더레 베리민(한라산을 보면) 도체비불만 팔락팔락"하던 고향에서도 재미나게 살아보진 못했다는 그녀. 그 고향 땅을 다시 밟았을 때는 39년만이었다. 끝내 그녀는 홀로 치바의 해녀로 살아간다. 
 
해녀 친구 대여섯, 이 바다에서 물질하다 숨을 거뒀다. 그녀는 요코하마의 딸도 손자들도 같이 살자 해도 가지 않는단다. 이 노해녀. 68년을 어떻게 곤란할 때 살려준 바당을 잊고 갈 수가 있냐한다.
 
그녀의 언어는, 노래는, 육화된 영혼의 소리였다. 오랫동안 가슴으로 불러온 노래였다. 역사에 묻힌 징용물질. 주린 삶 속에 바다를 건널 수 밖에 없었던 재일1세의 삶은 바로 역사의 이름이다. 
 
정치권력자들은 대개 똑같은 소리를 한다. 권력화된, 관료화된 소리들이다. 절절하게 살아있는 소리는 없다. 그들은 수혜를 받는 자들이지만 이 땅에 산소를 말없이 공급한 것은 먼 데서 부르는 우리 어머니들의 노래다. 역사는 힘 있는 정치가나 권력자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빛나는 제주의 정신은 더 그렇다. 거친 파도와 싸우며 만들어 낸 것이다. 바로 오늘도 그 위대한 역사를 쓰고 있는 어머니의 외길 노래는 계속되고 있다. 이들의 노래를 들어라. 그들의 기억이 사라질 때 이 땅의 한 역사가 사라진다. 그녀의 노래는 단순한 노해녀의 노래가 아니다. 거친 파도를 헤치며 차별과 편견, 외로움을 이겨내고 홀로 당당하게 살아낸 한 시대의 역사다. 우리가 벗겨내고, 새로 써야할 우리시대 괄호 안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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