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주 봉성교회 목사·논설위원

제주 땅에 상주하면서 복음을 전한 개신교 선교사는 없었다. 천주교에서는 프랑스와 아일랜드의 선교부가 꾸준히 일꾼들을 보낸 것이 매우 큰 힘이 됐다. 이에 비하면 제주개신교의 역사는 매우 어려운 길을 걸어왔다고 말 할 수 있다. 100여년 전 평양과 서울에서 교회가 한참 성장하던 시절에 제주선교는 한국교회가 감당하겠다고 선언했다. 말하자면 독점 선언인 셈이다. 당시 일본이나 만주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제주인들은 우리가 책임진다는 의욕을 보인 것이다. 그래서 외국인 선교사들은 나설 수가 없었다. 
 
호남지역에서 일하던 선교사들 중에 몇 사람은 제주를 잠시 순회하기는 했다. 일제시대에는 제주는 전라남도의 일부였으니, 책임구역을 돌아보는 수준이었다. 해방 된 이후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행적을 살펴 정리할 때 단연 눈에 띄는 사람이 있다. 서서평(1880-1934)이라는 여자 선교사이다.  
 
그녀는 모든 불리한 조건을 돌파하고 일했다. 남녀차별이 심하던 시대에 여성으로서 남성들에 뒤지지 않는 능력을 발휘했다. 유대인이며 천주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개신교 선교사들 사이에서 부지런히 일했다. 뉴욕에서 성장했지만 남부 출신들로 구성된 호남선교부에서 인정받았다. 간호사로서 의사들 사이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영역을 확보했다. 임직받은 목사들이 많았지만 복음 전하는 은사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녀의 능력과 열정을 경험한 이들은 1000명의 몫을 감당하는 일꾼으로 평가했다.  
 
한국의 문화를 사랑했다. 한국어 구사 능력에서도 그녀는 발군의 재능을 발휘했다. 뒤에서 들으면 한국인인 듯 정확한 발음으로 품위 있게 표현한다는 칭찬을 들었다. 그래서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적이라는 이야기도 흔히 나왔다. 미국에 유학가는 학생이 있어서 영어를 배우려 하자, 서서평이 추천됐다. 정확하고 품위있는 영어를 습득하는 데 그녀가 가장 낫다는 이유였다. 
 
어려운 이웃들과 동화된 삶을 살았다. 보리밥에 된장국을 즐겨 먹었다. 조선사람처럼 차려입고, 고무신을 신고, 아이를 업고 있는 사진이 남아 있다. 고아들을 데려다가 자녀삼아 길렀다. 그 중에는 제주에서 데려간 순이라는 아이도 있었다. 또한 많은 한센인들을 보살폈다. 장례식은 광주시민장으로 치러졌는데, 시민장은 광주에서 처음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며 수많은 한센인들과 시민들이 울부짖으며 영구행렬을 따랐다.  
 
한국에 온 1912년부터 22년 동안 쉬지 않고 조선을 위해서 일했다. 1917년에 제주도를 처음 방문했는데, 이후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다섯 차례에 걸쳐 제주섬을 찾았다. 추자도에도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마지막 방문에서는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무리한 여정을 계획했다. 주위에서 모두가 만류했지만, 마지막 기회이기에 더욱 열심을 내었다. 앉지도 못하고 누운 채로 가르쳤다 한다. 그럼에도 제주섬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이듬 해에 그녀는 별세했다. 
 
제주 여인들의 삶에서 그녀는 특이한 활력을 발견했다고 보인다. 잠녀들의 놀라운 능력과 가정 경제의 큰 몫을 감당하는 제주여성들의 위상을 높이 평가한 듯하다. 당시 육지에서는 볼 수 없는 경이로운 일이었다.    
 
근래에 호남 지역에서는 서서평의 사역을 발굴해 정리하고, 그녀의 뜻을 이어간다는 흐름이 크게 일고 있다. 
 
제주에서의 사역이 매우 소중한 부분이지만, 그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아쉽기만 하다.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마저 거의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