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문철 전 제주도교육청 교육정책국장·논설위원

날이 갈수록 우리네 일상사(日常事)가 복잡하고 또 미묘해져 간다. 내 나이 아직은 어른들 앞에 조심스런 초로(初老)에 불과하지만, 돌이켜 보건대 우리들의 어린 날, 젊은 시절에도 이랬었나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열두 번이다. 도대체가 쉽고 간단한 게 없다.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오묘한 기류에 맞춰 살아가기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그런지, 옛날과 달리 오늘날은 '스승' 이니 '어른'이니 하며 존경 받는 인사가 극히 드물다. 아마도 영민(英敏)한 젊은이들의 눈에는 고리타분하고 답답하게만 보이는 모양이다. 
 
그래서 요즘은 웬만해선 그 누구도 이른바 '법어(法語)'를 펼 생각은 하지 않을 게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말년에 툭하면 시국사안(時局事案)에 끼어드는 젊은 사제들을 향해 한소리 하셨다가 사실상 즉각 면박을 당했다는 토막기사를 본 기억이 난다. 저들의 무례인지, 어른의 주책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마음 한 구석에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요즘 밖에 나다니며 어쭙잖게 나잇살 앞세워서 부탁하지도 않은 시킴소리 늘어놓다가는 낭패 보기 십상이다. 차라리 남의 말을 묵묵히 듣는 편이 훨씬 재미도 있고 맘도 편할 것이다. 이러한 상념(想念)은 비단 집밖 사람들에게서만 느껴지는 게 아니다. 집안 식구들도 그다지 예외는 아니다. 내 아내, 내 자녀와 손자손녀들도 요즘은 제 할 말 하고 사는 세상이다. 
 
이러한 세태에서 우리 기성세대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시간이 많진 않겠지만, 그래도 미지의 남은 시간들을 경계인(marginal man)처럼 그럭저럭 소모적으로 살다 가기에는 일말의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는다. 그러기에 이쯤에서 우리 기성세대들도 열린 맘으로 우리를 둘러싼 전통의 관습과 각양의 사고와 가치들을 내려놓고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동안 우리 세대가 여기까지 짊어지고 온 것들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학벌, 문벌, 전통, 규범, 권위, 경험, 연령, 성별, 직업, 지위, 재력 등이 아닐까. 이러한 것들은 유구한 세월을 이어오는 동안 사실상 금과옥조(金科玉條)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로 여겨져 온 게 사실이다. 기성세대에게 동의 여부를 물어볼 겨를도 또 필요도 없이, 오늘의 시대는 아주 많이 변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그토록 소중히 여겨오던 전통적 가치들은 오늘의 상황에서 거센 도전에 맞닥뜨려 있다.
 
 '학벌이나 문벌'은 '개인의 능력'이라는 가치 앞에 사실상 무력화 됐고, '전통이나 규범'은 21세기의 '새로운 가치체계'에 의해 부득이 체제 개편을 불러왔는가 하면, '권위, 연령' 등은 어쩌면 저절로 소멸되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직장은 물론 가정에서마저도 해묵은 '남성 우위론'을 들고 다니다가는 '무식한 촌놈' 소리를 피치 못하게 되었다. 이 시대에 '직업'의 개념은 우열이나 귀천이 없이 '개인의 능력별 실속'위주로 그 맥을 고쳐 잡았다. 이제 '재력' 하나 남았으나, 이 또한 오늘의 젊은 세대들을 굴복시키는 데는 그리 큰 힘이 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에겐 '젊음과 패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사람을 압도하던 '전체와 규모'의 카리스마도 이제는 '개별적 요소'로 분해돼 그 권위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게 됐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간단(間斷)없이 굴러야 하고, 시대는 변해야 한다. 
 
따라서 사람은 시대의 필요충분조건에 따라 적응하며 계속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 나가야 하고, 전후세대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 새로운 질서와 가치들을 추구해 나가야 한다. 이제 새로운 수레바퀴는 이미 구르기 시작했다. 
 
문제는 우리 기성세대들이 어디에 어떻게 서야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뇌하고 또 탄력 있게 행동해야만 한다. 세대와의 부끄러운 야합이 아니라 역사와의 아름다운 동행이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