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식 정치평론가·21세기 한국연구소 소장, 논설위원

8월16일 오전 9시45분께 광화문앞 서울광장에서 교황은 124위 시복식을 위해 자동차를 타고 천천히 교단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때 청중석 옆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의 외침이 있었는가 보다. 갑자기 교황이 무개차를 세우더니 내려서 유가족석으로 이동했다.
 
거기에는 400명 정도의 유가족들이 모여 있었고, 그 속에서도 현재 '진상규명'과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진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중인 김영호씨가 그의 모습을 보였다. 그는 더부룩한 수염을 펄럭이며 교황께 인사를 했다. 이어 교황과 김영호씨는 손을 부여 잡고 몇마디의 인사를 나누더니, 맨 마지막으로 김영호씨가 자신이 교황에게 쓴 편지를 내밀었다. 우리는 교황이 편지를 받고 그것을 자신의 호주머니에 단단히 집어 넣는 것까지 볼 수 있었다.
 
아시아 가톨릭에서는 사회 정의와 같은 이슈가 부각돼 있는데, 이 점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인적 성향과 맞아 떨어진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런 입장은 가톨릭 교회가 가난과 소득 불평등 등의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해 온 것과도 일치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십자군전쟁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과 평화를 추구한 성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딴 교황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세월호 유가족의 문제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방한의 목적상 그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게속 만나 왔다. 서울공항에서 맨처음 접견이 이뤄졌고, 이튿째인 8월15일에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서 개최된 성모승천기념제에서도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났다. 이때의 분위기를 유가족들은 "국내의 어느 정치인, 어떤 지도자보다도 더 깊은 위로를 받았다"고 전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에수가 다시 현실에 태어난다면, 보여줄 여러 행동들을 우리들에게 과감없이 보여줬다. 지금까지 교황이 갖고 있는 '빈자의 성인'이라는 별명이 결코 말장난이 아님을 그는 우리에게 성실한 실천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개혁이라는 용어조차 사용하지 않고 교회의 모든 스펙트럼을 아우르면서 수세기에 걸쳐 일어난 쇄신의 단초를 연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실 때에 가난한 자들, 억압받는 자들을 위해서 오셨음을 환기시킨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교회는 가난한 자들을 먼저 배려해야 한다. 그동안 여러 복잡한 요인들이 종교의 중요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도록 막아 왔다. '서로 사랑하라'는 신앙의 기본정신도 다 수행하지 못하게 막아왔다.
 
그것을 원래 방향으로 돌려 놓는다는 것이 지금 시대 프란치스코의 정신이다. 그래서 그는 상처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이 세상의 모든 형제갸 다 소중하다는 관점에서 이웃과 친밀성을 나눈다. 결국 이런 행동을 통해 교황이 로마로 돌아갈 때, 그가 던질 마지막 말의 중요성을 환기시켰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박근혜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그러면 방문자의 에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활철학은 여전히 가난한 자들을 더욱 귀하게 여기고 있다. 이번 방문이 국빈방문임을 알고도 방한을 손수 허락한 데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한 리본을 끝까지 교황의 복장에 달고 있었던 것이 말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교황과 우리나라의 국민들은 여러가지로 잘 맞았다. 그 가운데서도 핵심은 리더십과 소통의 중요성이다. 게다가 지금 한국에는 직접민주주의와 간접민주주의 사이에 치열한 의제설정과 관련한 새로운 갈등이 시작되고 있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과연 이 방향을 어떤 방향으로 돌리는가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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