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호 전 애월문학회 회장·시인·논설위원

올망졸망한 밭 사이로 오솔길을 걷다가 밭 구석에 버려진 지게의 잔해를 보았다. 지금은 사라져가는, 까맣게 잊은 지 오래된 것. 옛 친구나 되는 듯 눈이 번쩍 뜨이고, 어릴 적 나무뿌리를 캐러 다니던 생각에 어깨가 벅적지근 해왔다. 마치 홍역을 앓은 듯 숭숭한 좀 구멍이 빈틈없이 박힌 지게, 발로 툭 건드렸더니 아무 힘도 없이 부서져 내렸다. 이 정도로 삭으려면 족히 오륙십년은 견디면서 할아버지에서 손자까지 한 삼대를 잘 섬겼을 터, 아낌없이 제 수명을 다해 봉사했을 것이겠다.  
 
지게쯤이야 별 관심의 대상도 되지 않는 하찮은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농촌에서 지게는 그 사용빈도나 용도 면에서 수족이나 다름없었다. 좁고 꼬불꼬불한 밭길이나 논둑길에서 이보다 효율적인 일인용 운반도구는 없다 할 것이다. 사용하기에 간편하고 몸무게의 두 세배(130~200㎏)는 거뜬히 져 나를 수 있어서 작은 짐 따위는 지게가 안성맞춤이다.
 
지게의 효율성과 편리함은 저 6·25 때 전쟁을 수행하는 중요한 운송수단이 되기도 했다.  
 
산지가 70%인 산악지역에서의 전투는 그대로 악전고투였다. 트럭이 오를 수 없는 고지에 무거운 포탄을 나르는 데는 지게만한 게 없었다. 해 지게부대가 창설됐다 한다. 일명 육군지게부대(노무사단)라 했고, 미군들은 'A-Frame Army'라고 불렀다. 이로 해 수적으로 우세한 중공군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서울역에서 부터 부두며 버스 종점마다 지게꾼 시인으로 득실거렸다. 한 많고 설움 많은 피난살이에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는데 지게가 한몫을 했다. 
 
지게시인 김신용의 '환상통'에서 '한때,/ 지게는 내 등에 접골된/ 뼈였다/ 목질의 단단한 이질감으로, 내 몸의 일부가 된/ 등뼈.// 언젠가/ 그 지게를 부수어버렸을 때, 다시는 지지 않겠다고 돌로 내리치고 뒤돌아섰을 때/ 내 등은,/ 텅 빈 공터처럼 변해 있었다/ 그 공터에서는 쉬임없이 바람이 불어왔다.' 지게에 실린 설움과 아픔이 싸아한 연민으로 젖어들게 한다. 지게는 우리민족의 고유의 것이며 신라시대에 지게 진 토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역사 또한 유구하다. 그러나 제주에서의 지게의 역사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할 것이다. 내 어릴 적 기억으로는 6·25당시 피란민들로 넘쳐났는데 지게도 함께 바다를 건너오지 않았나싶다. 지금은 문명의 이기에 밀려 사라지는 지게가 오랜 친구처럼 갑자기 그리워지기까지 하는 것은 지난 8월 조선일보 독자면에 소개된 '지게효자'에 대한 감동 때문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이렇다. 41세의 이군익씨가 92세의 아버지를 '지게의자'에 태우고 금강산 관광을 시켜드렸다는 것이다. 이씨는 금강산을 보고 싶다는 아버지를 위해 알루미늄 지게를 제작하고 그 위에 방석을 얹고 안전벨트까지 달았다. 지게 15㎏, 아버지 45㎏ 도합 60㎏을 지고 금강산 만물상 전망대까지 갔다 오는 동안 이씨의 윗몸은 온통 피멍이 들었다. 감동을 받은 중국교포의 초청을 받고 이씨는 다시 아버지를 지게에 지고 공자의 묘가 있는 태산을 올랐다. 중국의 매스컴은 일제히 '한국의 효자'의 이야기를 보도했다고 한다. 
 
요즘 우리는 세월호 참사로 방향을 잃은 듯 매우 참담하고 답답하다. 우리사회가 뒤죽박죽  갈피를 못 잡고 혼란스럽다. 부모를 내다버리는 현대판 고려장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지게는 말이 없다. 옛적 고려장 설화에서 부모를 산속에 갖다버리는데 쓰인 것도 지게이고 아버지의 소원대로 금강산을 구경시켜드리는데 쓰인 것도 지게이다. 
 
문제는 제도가 아니고 사람이다. 인생도 기업도 국가도 결국 경영이라고 한다면 삶의 주체인 그 사람의 인생관과 경영철학이 언제나 중요한 보편적 가치가 될 것이다.   
 
모처럼 '지게 효도' 이야기는 그래서 오랜 장마 끝에 파란하늘처럼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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