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방희 생활경제연구소장·논설위원

어떤 미국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보다가, 한 순간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어느 빈티지 상품 경매 및 판매업자 하나가 자신이 낙찰 받은 손수건을 보면 혼자 중얼거리는 장면이었다. '손수건(handkerchief)으로 팔면 10달러(약 1만원), 포켓스퀘어(양복 윗주머니 장식용 손수건·pocket square)로 팔면 40달러! 이것이 마케팅의 기본이지.'
 
'같은 재료, 같은 디자인의 상품이 엄청난 가격 차이에 팔린다?'. 경영학을 전공하고 경제를 공부해온 나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말이었다. 
 
같은 제품을 두고 이름만 다르게 부르는 것으로 가격 차별화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알려진 지식과 상식을 떠나, 스스로가 그 출연자의 지적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실제 몇 개의 포켓스퀘어를 엄청난 가격을 주고 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손수건이었다면 그런 가격에 살 리는 없었다. 
 
왜 그랬을까. 포켓스퀘어라는 상품은 신사의 정장 차림을 완성한다는 환상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뭔가 완벽한 차림으로 남들로부터 선망 받고자 하는 욕구를 상징한다. 주머니에 들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손수건과는 다르다. 말하자면 포켓스퀘어는 환상 상품(fantasy goods)인 반면, 손수건은 그저 일상적인 상품일 뿐이다.
 
환상 상품은 현실을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는 점 때문에 점점 더 인기를 끌고 있다. 어떤 상품이 가진 환상성이라는 특징도 과거에 비해 더 주목받고 있다. 점점 각박하고 고단해지는 현실과 일상이 소비자의 이런 수요를 더욱 자극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 불멸의 환상 상품이라면 영화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영화는 소비자로 하여금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두 시간 가까이 현실을 떠나 온전히 환상에 빠질 수 있게 해준다. 미국 헐리웃 영화가 미국 시장을 넘어 세계를 제패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대공황 당시다. 소비자들은 현실이나 일상이 어려워질수록 환상상품이나 상품의 환상성에 목을 맨다.
 
어떤 환상 상품에 대해서는 크게 기대했다가 실망하기도 한다. 실제로 환상을 충족시켜주기는 커녕 평범한 현실과 일상만 떠올리게 하는 경우다. 프랑스 파리가 요즘 그렇다. 파리를 꿈에 그리면서 평생 돈을 모아 실제로 찾았다. 그런데 풍광은 기대만 못 하고 사람들은 불친절하기 그지없다. 이에 실망한 일본의 몇몇 중년 여성 관광객들은 자살하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파리 신드롬(Paris syndrome)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최근 파리 시내에는 현금을 많이 들고 다니는 중국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절도마저 크게 늘었다. 이에 따라 중국 관광객들의 파리 단체 관광이 급전직하하고 있다.
 
제주 역시 대단한 환상 상품이었다. 공항 착륙 전 기내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제주는 일상을 잊게 해주었다. 녹색 수목과 검은색 돌, 거센 바람이 만들어낸 물결 같은 벌판의 기묘한 조화부터가 이국적이었다. 내국인들로서는 1시간만 투자하면 엄청나게 부담스럽지 않은 예산으로 현실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 제주는 파리 신드롬을 앓기 시작했다. 환상성은 온 데 간 데 없고 쉴 새 없이 현실을 깨닫게 해주는 곳이 되고 말았다. 제주 관광과 휴식을 위한 비용은 끊임없이 올라가고 있다. 성수기 비행기와 숙소 잡기는 하늘의 별 따기가 돼 간다. 이국적 풍광은 건설 현장과 도로 일색이 되고 말았다. 숙소나 식당에서는 무리지어 다니는 중국 관광객들 뒷전으로 밀리고 말았다. 많은 내국인 관광객들은 이제 더 이상 제주에서 현실과 일상을 벗어난 환상을 경험하지 못한다. 이것이 진짜 제주 관광의 문제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