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원 제주대 사학과 교수·논설위원

은(殷) 왕조를 계승한 주(周) 왕조는 봉건제도를 채택해 천하는 일가라고 하는 대가(大家)주의의 정신을 지배원리로 했다. 그러나 주나라 역시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혈연의식이 희박해지면서 혈연의 원리보다는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로 변모돼 갔다.
 
뒤이어 등장한 춘추시대는 여전히 주나라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제후들이 조심스럽게 견제하는 시대였지만 전국시대는 제후 상호간에 실력 다툼이 점차 격화되면서 사실상 군웅할거의 상태에 돌입했다. 
 
전란의 상태가 한층 격화된 전국시대에는 많은 유세객(遊說客)이 발생했다. 국가의 흥망이 격화되면서 망국의 신하들이 직위를 잃고 새로운 자리를 구하기 위해 여러 나라를 떠돌아 다녔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 치의 혀를 생명으로 하는 지식층 유세객이었다. 넓은 중국에서는 한두 번의 싸움으로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자연적으로 장기전의 형상을 띄었다. 따라서 직접적인 전력(戰力)보다는 기초적인 정치력이나 경제력의 정도가 훨씬 중요했다. 때문에 정치나 경제에 밝은 문인을 존중하게 됐던 것이다. 
 
이러한 지식인들은 각지의 권력자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구상과 포부를 열심히 설명해 등용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었고 여러 제후국들이 세력을 다투는 상황 속에서 각 제후국의 권력자들로서는 전문적인 지식을 활용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우리가 제자백가(諸子百家)라 부르는 고대 중국의 다양한 사상 유파들이 대략 춘추시대 말기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된 유세객에 연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들이 끼친 영향은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급격한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이해하는 방식과 그에 대한 대처 방안이었다. 권력자들의 관심은 어떤 유세객이 보다 정확하게 지금의 변화를 이해하고 보다 유망한 방안을 제시하는가에 있었다. 유세객들이나 권력자들 모두 자기 시대가 처한 변화의 의미와 방향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러 제후국들이 난립하는 시대 상황은 일종의 언론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해 주었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나름의 식견과 포부를 펼칠 수 있는 기회가 허락돼 있었기 때문에, 사상의 성격과 내용 또한 그 어느 시대보다 다채로울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현대의 정치인들이 국민들에게 쏟아내는 정치적 언사 및 행동과도 비견할 수 있다.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유세객이자 동문수학한 친구 사이인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는 천하대세에 대해 서로 전혀 다른 분석을 내놓는다. '합종(合縱)과 연횡(連橫)'. 두 사람은 이 논리를 들고 천하를 떠돌며 자신들의 식견을 팔아 출세했다. 이들의 활약상과 정치외교적 논리는 오늘날에서도 충분히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세객은 사마천의 평가대로 '실로 위험한 사람'들이었다. 사마천은 이들이 내세운 논리와 언변이 갖는 근본적 한계와 위험성을 경계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논리가혀가 많은 사람을 해칠 수 있고 나아가서는 나라 또한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 있어서는 국민에게 유세하고 그 신임을 얻어 선출되는 국회의원을 비롯해 여론을 주도하는 오피니언리더(opinion leader) 또한 유세객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국가의 주요 사안들에 대해 국론이 분열될 대로 분열된 현재의 상황에서 필자는 다만 현대판 유세객들이 국민들로부터 '실로 위험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