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휴 전 초등학교장·논설위원

며칠 전 다랑쉬오름을 올랐다. 가파른 길에 좀 쉬면서 올라온 길을 되돌아보려니, 언제 자랐는지 팔을 벌리고 막아선 나무들이 시야를 가리고 있어 답답하기만 하다.

다랑쉬오름의 매력이라면, 올라가고 내려오면서 그리고 오름 능선에 올라서서 바라보는 시원한 조망(眺望)이 일품이었는데, 이제는 그 즐거움조차 누릴 수 없게 돼 버렸다. 나무가 자라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함께 간 여럿이 모두 한입으로 하는 말은 '답답하고 재미없다'는 것이었다. 능선에 올라서서도 사방을 시원스럽게 볼 수 없으니 다랑쉬의 매력은 이제 반감(半減)될 게 뻔하다. 오름을 관리하는 분들이 있다면 나무가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막고 이미 자란 나무들도 잘라내야 할 것이다. 오름의 서쪽 능선에는 벌써 나무들이 많이 자라 있었다. 가 봐도 사방이 막혔을 게 뻔할 것, 능선 따라 한 바퀴 돌면서 사방을 휘둘러보던 즐거움은 포기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다랑쉬굴로 발길을 돌렸다. 좁은 길 양쪽의  대나무가지 등으로 차 옆구리가 긁히는가 하면 거의 90도로 꺾이는 좁은 길에서 까딱 잘못하면 차가 꼼짝 없이 갇힐 뻔하기도 했다. 겨우겨우 빠져나가 굴 입구 가까이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한숨부터 나왔다.

4·3 유적지로 알려졌기에 우리 제주사람들은 물론이고 외지에서도 뜻 있는 분들이 많이 찾아올 이곳 진입로가 이래서야 되겠는가. 66년 전인 1948년 음력 12월18일, 이곳 굴속에서 두려움에 벌벌 떨다가 결국에는 '토벌대'의 수류탄 투척에 이어 불을 질러 질식시키는 작전에 숨 막히는 고통을 참다가 죽어간 열한 분의 고인들에게도 너무 미안한 일이 아닌가. 아홉살 어린이부터 50대 아주머니까지 이들 민간인들이 무슨 이념을 알았을 것이며 더구나 무슨 저항의식 같은 걸 가지고 있었을 것인가.

행정당국과 4·3평화재단 등에 건의하고 싶다. 우선 다랑쉬오름의 조망을 막고 있는 나무들을 과감히 잘라내고, 또 더 이상 능선 가까이 올라가지 못하게 '왜소화(矮小化)'시킴으로써 다랑쉬오름의 조망권(眺望圈)을 넓혀야 한다. 자라는 대로 두는 게 '자연보호'라는 안일한 생각을 버리고, 오름 능선에 올라서서 가까이 또는 멀리 바라보면서 가슴 탁 트이는 '전망 좋은 다랑쉬오름'을 복원해야 할 것이다.

예전의 다랑쉬오름은 맑게 갠 날에는 일출봉과 우도까지, 그리고 주변에 펼쳐진 크고 작은 오름들을 보는 즐거움을 안겨주는 전망 좋은 오름이었다. 높고 낮은 오름들이 오순도순 속삭이듯 모여 있는 걸 바라보면서, 우리는 제주가 '오름의 왕국'임을 새삼 느끼곤 했지 않은가. 미적거리면서 미룬다면 다랑쉬오름의 나무들은 우리들의 게으름을 비웃으면서 오름 능선까지 올라갈 것이고, 몇 년 안 돼서 답답하기만 하고 오르기는 힘든 '매력 없는 다랑쉬오름'이 돼 버릴까 걱정된다.

다음으로 다랑쉬굴의 진입로를 넓히고 펴면서 굴 입구도 조금은 열어놓는 방법을 생각해주기 바란다. 열한구의 시신이 44년 만에 발견돼서 화장됐으니, 이제 그들의 원한이야 어느 정도 풀렸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살아남은 우리들로서는 그 앞에서 뒤늦은 위로의 묵념이라도 올릴 수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소박하나마 작은 묵념대라도 정성껏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이곳에서 숨진 이들의 넋이나마 위로하고 그들의 명목을 빌 수 있도록 말이다. 며칠 전의 우리 일행은 그 앞에 세워 놓은 안내판 앞에서 잠깐 묵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 우리가 아무리 가슴을 친다 해도 이미 숨져간 그들을 살려낼 수는 없다. 하지만 가슴에 멍울져 있는 응어리를 조금이라도 삭여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숨 막히는 연기 속에서 숨져간 이들의 원혼을 달래주는 일, 그것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또 있을까. 부디 저 먼 곳에서나마 가슴 쓸어내리면서 편히 잠들기만을 바랄 뿐, 이제 와서 우리가 어떤 일을 더 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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