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라는 욕망의 굴레

영화 이야기 하나. 최근 개봉한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시청 말단공무원 수철은 죽기 전에 3류밴드의 리더로 있는 친구 성우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 행복하니" 자신은 지방의 말단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지만 너는 그렇게 하고 싶어하던 음악을 하고 있어 행복하냐고 묻는 수철의 모습은 영화를 보는 이의 가슴을 이내 서늘하게 한다.

다른 것도 아니고 행복하냐는 단 두 음절의 질문은 영화가 보여주고 싶어하는 일상성의 추레함과 지나간 희망의 이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행복. 처세와 치부의 방법을 ‘∼하는 몇 가지 방법’ 등의 식으로 요점 정리해 보여주는 책들은 하나같이 행복을 이야기한다.

행복하기 위해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행복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행복하기 위해, 행복하기 위해….

행복에 대한 끊임없는 강요는 행복을 단지 즐겁고 편안한 삶의 한 양태를 뜻하는 말에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변모시켰다. 행복에 대한 끊임없는 강요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

역사는 발전한다는 명제가 옳다면 현대인들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행복을 누려야 하거나 행복에 대한 희망으로 가슴 벅찬 일상을 살아야 하지만 현대인들은 결코 행복을 누리고 있지 않다.

오히려 행복하지 않다는 상대적 박탈감에 고통스러워하며 일상의 권태를 하나의 죄악으로 생각하고 있다. 지금 세상은 행복에 대한 강요, 더 나아가 행복에 대한 의무를 우리에게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신의 영역에서 인간의 땅으로 내려온 행복

「영원한 황홀」은 행복에 대한 에세이다. 그러나 단지 행복이라는 관념을 이루기 위한 현대인의 처세와 치부의 방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저자는 행복이 지상과제로 자리잡게 된 역사적 과정을 추적하며 행복과 불행에 대한 관점을 다양하게 분석하고 있다.

중세 이전 서구에서 행복이란 내세에는 존재하지 않는 오직 신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인간이 원죄를 범하면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지상의 삶은 파멸과 구제의 장소로 인식돼 왔다.

지상의 쾌락은 용인되지 않았으며 구원을 이루지 않고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나의 하느님이 아니면 그 어떤 풍요도 나에게는 궁핍’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처럼 신의 세계에서만 가능했던 행복은 중세 이후 특히 계몽주의를 겪으며 인간의 세상으로 ‘비로소’ 내려왔다.

탈종교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인간의 땅으로 내려온 행복의 장애물은 이제 일상성과 평범성으로 대치됐다. 빠른 속도로 변모하는 사회의 변모 속에서 현대인은 일상성과 평범성이라는 타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인식 때문에 오히려 고통스럽다.

현대인에게 있어 권태란 급진적·극단적 처방이 아니면 그 도저한 메커니즘을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단단한 고리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딜레마에 사로잡힌 현대인에게 평범성의 양면을 제기한다. 평범성은 방황의 늪으로 함몰되게 만들기도 하지만 창조적 빛의 지평으로 인도하는 자극제의 역할도 한다는 것이다.

#행복, 그 다다를 수 없는 욕망의 쳇바퀴

도덕은 행복과는 합치될 수 없다는 고전적 명제는 이미 낡았다. 행복에 대한 의무는 도덕성과 합치되면서 하나의 절대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행복에 대한 절대 명제가 넘쳐나는 현대에서 저자가 우리에게 말하는 행복에의 방법은 오히려 간단하다. 역사는 우리의 이상과 욕망이 대립과 갈등을 빚으면서 비극적 측면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고. 현대인은 이런 비극성을 받아들이고 세상이 흘러가는 동안에 훔친 짧은 환희로서의 즐거움을 선호해야 한다고.

행복의 이데올로기가 오히려 행복을 갉아먹는 현대의 단면을 날카롭게 들여다보고 있는 「영원한 황홀」은 말 그대로 황홀을 향한, 인간의 다다를 수 없는 욕망의 쳇바퀴를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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