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익 수필가·논설위원

   
 
     
 
10여년 전,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교직원들과 모처에서 식사 중이었다. 갑자기 여교사가 정신을 가누지 못하고 헐떡거리는 게 아닌가. 동료들의 눈길이 쏠리자 더욱 숨결이 거칠어진다. 혹여 심각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됐다. 상황이 급박한지라 여교사들을 딸려 병원 응급실로 보냈다. 정신이 그쪽으로만 쏠려 밥을 어떻게 먹었는지 모른다.

뒷날, 그 여교사가 나를 찾아왔다. 공황장애가 있다는 걸 털어놓는 게 아닌가.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 병명이어서 증세가 어떤가를 물어 봤다. 사람이 많은 곳이라든가 심적으로 어떤 갈등을 겪게 되면 극심한 불안에 시달린단다.

요즘 들어 그 말이 자주 인구에 회자한다. 연예인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이 병의 늪에 빠져 허우적댄다고 한다. 그들은 일반인들과는 달리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생각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보니 마음고생이 심하게 되고 자연 그런 증상에 엮이게 되나 보다.

공황장애는 극단적인 불안증상을 의미한다. 지금은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으며 불안이 이 병을 키운다는 점도 꿰고 있다. 인간이 세상에 존재감을 드러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안은 늘 감정의 한 축을 담당해왔다. 예전에는 그 강도에 기복이 심했다. 21세기로 들어서면서 불안이 일반화되고 일상화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안을 캐기 시작한 것은 실존철학의 선구자 키에르케고르다. 그는 "불안은 개인의 문제이자 인간 존재를 규정짓는 영역이다"고 밝혔다. 동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오직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고유의 감정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불안은 저마다 다르게 나타나지만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일반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아침뉴스를 시청하노라면 세상이 하도 시끄러워 좌불안석이 된다. 무상으로 시작하는 복지 시리즈의 불협화음이 마음속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킨다. 정부시책에 무조건 머리띠 두르고 시위로 일관하는 풍토도 눈꼴사납다. 보이스피싱을 비롯한 온라인 범죄에다 병원체의 변이종까지 설쳐대는 판국이다. 그 녀석들이 언제든지 인류를 덮칠 수 있다니 불안이 가중될 수밖에….

뉴스가 아니어도 불안은 여전하다. 시장에서 먹거리들을 살 때 혹여 중국산이거나 후쿠시마산이 아닐까 의심의 눈초리를 흘리게 된다. 아이들을 학교로 내보내면서도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는 험한 세상이다.

졸업한 학생들이 사회로 쏟아져 나와도 불안은 여전하다. 무한경쟁시대가 아닌가. 고용불안의 시대에 취직이라는 관문을 어찌어찌 통과했더라도 언제 구조조정을 당할지 몰라 속 끓이며 살아가기 십상이다.

지금의 사태가 계속 이어진다면 국가도 마찬가지다. 저출산·고령화의 늪에 한 발 더 다가서 있고 수출에 비상이 걸린 우리로서는 세계경제가 되살아나기만을 바랄뿐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선두 그룹들의 경기 침체도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불안은 늘 우리 곁을 따라다닌다. 한 집안에서도 조부모 부모 자식들 모두 나름대로의 불안을 가지고 있다. 남녀노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불안을 껴안고 살아가고 있기에 동물이 아닌 인간의 반열에 서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이 있기에 인간은 위대하다"고 설파했다. 그게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만족하지 못하다는 뜻이고 노력하면, 해소하고 충족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역설적인 얘기일 것이다.

불안은 개개인의 심리적 병리로만 치부하는 개념에서 벗어나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를 해결해나가는 계기로 삼음이 어떨는지. 그러할 때 불안은 그저 기피의 대상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역할을 다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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